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동북아역사재단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로고 뉴스레터

NAHF 소식
화제의 발굴, 미군 기밀문서에서 확인한 “독도는 한국의 일부”
  • 홍성근 독도실장
선물처럼 만난 독도폭격사건 자료
 
최근 독도 연구에 매우 의미 있는 자료를 접했다. 지난 6월 15일, 당시 독도체험관 관장이었던 김종근 연구위원의 소개로 전갑생 교수(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와 간담회를 가졌다. 전 교수는 2023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스캔한 1948년 독도폭격사건 관련 문서철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독도폭격사건에 관한 미군 측 자료를 찾고 있었는데, 바로 그 자료들이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전 교수는 독도 연구에 소중하게 활용되기를 바란다며 흔쾌히 자료 기증 의사를 밝혔다. 이후 일정을 조율하여 지난 7월 7일 기증식을 열었다.
 

가슴 뛰게 한 독도 영유권 기록
 
6월 22일 전갑생 교수로부터 독도폭격사건 문서 파일을 전달받았다. 자료는 백지를 포함하여 모두 222쪽이었다. 독도폭격사건에 관한 미군 당국의 조사보고서를 묶어놓은 문서철이었다. 문서철에는 미 극동공군사령부 조사보고서를 비롯해 주한미군정청과 미 제1항공사단의 조사보고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민 끝에 기증식에서는 독도폭격사건의 쟁점 내용보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밝힌 문서를 중심으로 소개하기로 했다.

전갑생 교수는 독도폭격사건 관련 미군 문서를 수집하게 된 경위와 문서철의 구성 체계를 설명하고, 필자는 문서철에 담긴 독도 영유권 관련 기록과 그 역사적 의미를 정리해 설명하기로 역할을 나누었다.
 
미군정청의 조사보고서에 편철되어 있는 자료 가운데에는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된 한국 측 자료들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자료도 있었고 낯익은 문서도 있었다. 
 
image00009
독도 영유권 문답서
 

먼저, 폭격사건 직후인 1948년 6월 16일 울릉도사(현재의 울릉군수)가 주한미군 법무관에게 제출한 원본 문서가 있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인 이유를 문답 형식으로 설명한 자료다. 질문은 ‘독도 영유 문제에 있어서 조선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유 및 경위’였다. 필자는 이 문서에 ‘독도 영유권 문답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첨부서류에는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인식하며 살아온 울릉도 주민 홍재현이 1947년 8월 20일에 작성한 진술서가 있었다. 1946년 4월 25일 울릉도사가 경상북도지사에게 제출한 ‘울릉도 소속 독도 영유 확인의 건’이라는 문서도 함께 있다. 이 보고서는 광복 이후 국내에서 생산된 독도 관련 최초의 공적 문서로 새롭게 확인된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 다른 첨부문서로는 1906년 울도군수 심흥택이 일본의 독도 편입 소식을 알리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의 필사본이 있었다. 필사 시점은 1946년으로 추정된다. 이들 문서가 미군정청 조사보고서와 함께 편철된 것으로 보아, 독도폭격사건을 조사한 미군 조사관이 울릉도 현지에서 입수한 자료로 판단된다. 
 
image00010
1946년 울릉도사 보고서
 
image00011
심흥택 군수 보고서 필사본
 

미군정청 조사보고서의 첨부서류 말미에는 1948년 6월 18일 울릉도사(허필)와 관계 공무원들이 연명으로 날인한 ‘독도어선폭격사건’이란 제목의 진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자료들만으로도 충분히 일반에 공개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미군 문서에 명시된 “독도는 한국의 일부”
 
독도폭격사건에 관한 미군 당국의 조사보고서라면 미국 측의 독도 영유권 인식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문서철을 다시 면밀히 살펴보았다.
 
한 장 한 장 문서를 넘겨 가며 독도 영유권에 관한 미국 측 인식을 짚어나갔다. 미군정청 조사보고서에는 독도를 “한국 어민들이 상시적으로(habitually) 이용해 온 지역”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또한 독도가 “한국 경제에 기여하고 있으며, 이곳에 대한 폭격은 한국인들에게서 유익한 수입원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어 극동공군사령부 예하부대인 제1항공사단의 조사보고서를 살펴보았다. 이 보고서에는 독도를 표적으로 폭격 연습을 실시한 제93폭격전대의 훈련 경위와 폭격사건의 원인을 조사한 내용이 있었다.
 
그러던 중 전체 222쪽 가운데 184번째 장에서 ‘첨부 1(Inclosure 1)’이라는 표기와 함께 ‘독도폭격사건 보고서(Report of Bombing of Liancourt Rocks)’라는 제목의 문서를 발견했다. 
 
이 문서는 1948년 6월 24일 미 극동공군사령부(FEAF)가 미 극동군사령부(FEC)로 이첩한 문서들 가운데 첫 번째 첨부문서였다. 문서의 체계와 내용으로 볼 때 극동공군사령부가 작성한 보고서로 파악된다. 본문은 3쪽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 다시 첨부자료가 붙어 있었다. 본문 마지막 쪽을 읽던 중 깜짝 놀랄 만한 문구를 발견했다.
 
독도가 한국의 일부라는 것이 1947년 9월에 명확히 확립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전혀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못하여 일본의 한 섬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Although definitely established in September 1947 that Liancourt Rocks was a part of Korea, it is apparent that this never became general knowledge and was understood to be an insular part of Japan.)
 
image00012
미 극동공군사령부의 ‘첨부1’ 문서
 

1947년 9월은 극동군총사령관이 독도를 폭격 연습지로 지정한 시점이었다. 그해 9월 16일에 작성된 미군 문서에는 극동군사령부가 주한미군 측에 독도를 폭격 연습지로 지정한다는 사실을 통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극동 지역을 관할하던 미 극동군사령부가 당시 독도를 한국의 일부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보고서에는 극동군사령부가 독도에서 폭격 연습을 실시할 때마다 15일 전에 주한미군 측에 반드시 사전 통지하도록 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 역시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보고서 결론부에서는 극동공군사령부가 이러한 통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예하 부대의 책임을 묻고 있었다. 해당 부대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잘못 인식해 주한미군 측에 알리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독도 영유권에 관한 당시 미군 당국의 입장은 독도를 일본의 통치 영역에서 분리한 연합국최고사령관 각서(SCAPIN-677, 1946년)와 맞닿아 있다. 또한 독도를 한국 영토로 명시했던 미국 측 대일강화조약 초안(1947~1949년)의 흐름과도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이후 1949년 시볼드의 제안이나 1951년 러스크 서한처럼 독도를 마치 일본 영토인 것처럼 취급하려 했던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 이전까지 형성되어 있던 미국의 독도 인식이 일시적으로 왜곡되거나 변질된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일본은 한국이 1952년 평화선을 선언하면서 비로소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고, 독도를 불법으로 점령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한국 측 자료에는 1906년 대한제국기부터 1948년 미군정기에 이르는 기록이 담겨 있다. 이 자료들은 지방 행정관인 울릉도사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확고히 인식하고, 주권 수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지방 행정관과 주민들의 진술, 그리고 폭격사건 조사 기록은 독도가 오랜 세월 강원도 연안과 울릉 어민들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미군 당국 스스로가 독도를 한국인들의 생업 현장이자 한국의 일부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문서로 확인된 독도 인식
 
1948년 독도폭격사건은 독도에서 조업하던 우리 어민 14명이 희생된 매우 불행하고 슬픈 사건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번에 공개된 한국 측 자료와 미군 문서가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기록들이 세상에 나왔다. 문득 궁금해진다. 사건 직후 이 문서들을 작성했던 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답은 문서 속에 있었다. 이들은 담담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사실을 남겼다. 아픈 역사 속에서도 독도가 한국의 일부라는 인식만큼은 한미 양국 관리들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 그 인식이 80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 이제야 온전히 드러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