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전략적 중요성
1945년 9월 8일 자로 영국 외무성이 작성한 「Future of Korea(한국의 미래)」라는 제목의 기밀문서를 보면, 영국은 한반도 문제에 큰 뜻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사실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선언(1943)의 당사국이었다. 그러나 교역 규모나 전략적 이익이 적은 한반도 문제는 차라리 미국에 맡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군이 4개국 신탁통치안에 대해 의견을 구하기도 했으나, 역시 영국은 한국을 점령할 군사적 여유가 없다고 회신했다.
그로부터 한 달 반 후인 10월 22일, 영국 내각사무처에서 같은 제목의 문서가 작성되었다. 그런데, 이전 문서와는 어조가 달랐다. 영국의 한국 교역 규모가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는 입장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다만 한국에서 어느 한 국가가 지배력을 장악해서는 안 되며, 유엔헌장에 의거한 공동 관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어조의 변화는 한반도와 “(대한해협을 지키는) 제주도”가 “전략적으로 너무도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대목을 특히 강조하고 싶었던지, 4일 후에 수정 의견으로 강조 구문을 추가했다. 즉, “한반도와 (대한해협을 지키는) 제주도가” “일본, 만주, 중국 북부”를 통제하기에 상당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는 구문이다. 영국은 전략적 이익이 적다고 인정하면서도 한반도가 어느 한 국가만의 영향 아래 놓이는 상황을 경계했던 것이다.
제주도 일본군 병력 기초배치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이렇듯 영국은 광복 직후 한반도, 특히 제주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바로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을 비단 영국의 능력 부족이나 착오로만 볼 수는 없다. 미국도 광복 직후 “제주도에 관한 확실한 정보”가 없었다. 1945년 8월 19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시작된 항복 협의에 일본군이 제출한 부대 배치표에도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제주도에는 사단급 지원부대가 없었고, 지휘관은 중령급에 불과했다. 부대에서 정보력이 높다고 평가받는 정보참모부(G2)의 지도에도 제주도 지역은 ‘물음표’로 남아 있었다. 즉, 광복 직후 미국, 영국 등 연합국은 제주도의 가치를 가볍게 여겼던 셈이다.
그렇다면 미군은 광복 이후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를 어떻게 인지하게 되었을까? 그 계기는 주로 항복한 일본군이 작성한 ‘남한 주둔 일본군 병력 배치 현황표’를 통해서였다. 미군이 맡은 38선 이남에는 12만 2천여 명의 일본군이 남아 있었는데, 서울에 5만 7천 명, 광주에 3만 4천 명, 대구에 1만 5천 명, 부산에 1만 5천 명 등이었다. 그런데 제주도에는 무려 5만 8천 명이 있었다. 게다가 한반도 전체를 총괄하던 일본 제17방면군이 2개월 치 식량을 비축한 데 반해, 제주도 일본군은 6개월 치 식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연합군이 제주도를 통해 일본 본토로 진격할 것을 우려해 제주도를 요새화하고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른바 ‘결7호 작전’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미군이 제주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많은 비행장을 건설할 수 있는 전반적으로 평탄한 지형과 지도에서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지정학적 핵심 위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군은 제주도가 ‘제2의 오키나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크게 우려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항복식, 무장해제, 그리고 언어 문제
제주도에 대규모 일본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미군은 이들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즉시 파견대를 보냈다. 이미 서울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에서 항복 조인식을 치렀음에도, 미군은 제주 읍내의 한 학교 건물에서 별도의 항복식을 다시 열었다. 제주도에 남아 있던 병력의 규모가 컸던 만큼, 이들에게 종전을 명확히 알리고 신속한 무장해제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항복과 무장해제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태풍과 한 건의 화재가 있었으나, 큰 차질은 없었다. 미군은 일본군의 소총과 대포를 모슬포 앞바다에 수장하고, 전차와 항공기 엔진을 폭파했다. 또 일본군이 연합군과의 결전에 대비해 파놓은 벙커와 진지도 파괴했다. 일본군은 미군에 협조적이었고, 별다른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항복과 무장해제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의사소통은 그렇지 못했다. 언어가 말썽이었다. 『주한미군사』에는 “The Language Problem(언어 문제)”라는 소제목이 따로 있을 만큼, 통역은 미군정이 한국을 통치하는 데 큰 난관이었다. 제주도 항복식은 언어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난 대표적 사례다.
미군 선임 장교 그린의 발언은 매우 당황스러워 보이고 심하게 더듬거리는 일본인 2세 출신의 통역 미군에 의해 일본어로 통역되었다. … 그는 우리가 원했던 거의 모든 정보를 얻었다. 그 대부분은 정확할 개연성이 높지만, 통역은 힘들고 느리게 진행되었다. 모든 것은 통역되어야 했고, 종종 2명의 중개인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질문과 답변은 자주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때로 어떤 부분은 순전히 지쳐서 누락되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질문했던 일본인은 자신에게 고통스럽게 전달된 답변을 이해하지 못했던 듯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 2014, 『미군정기 주한미군사』1, 「일본의 항복과 점령의 시작」
소통은 미군과 일본군 사이뿐만 아니라, 미군과 제주 주민 사이에서도 문제였다. 제주 주민들은 미군에게 정보를 제공하면 일본인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였으며, 미군에 소속된 일본계 미군 통역병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제주 읍내에 미군 환영 현수막은 걸려 있었으나, 제주 주민들의 태도는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기류 속에서 미군은 일본군 측에 제주 주민들과 문제가 없는지 물었다. 일본군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답하면서도, 주민들이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팸플릿을 뿌리라고 요청했다. 나중에 미군정의 “civilian sources(민간인 정보)”에 따르면, 일본군은 “had behaved well(얌전히 행동해 왔다)”이라고 기록해 두었다.
US SOLDIERS ON PASS, KEIJO(SEOUL), KOREA; SURRENDER OF JAPANESE, ISLAND OF SAISHU, SAISHU TO, KOREA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http://kfilm.khistory.org/?mod=24&MOVIE_SEQ=7060&KIND_CLSS=24)
제주 주민들이 사실 그렇게 소극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한 제주 지역 신문 편집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팸플릿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배포했다.
일본인에 대한 불만을 말하기 위해(to complain of the Japs) 미군을 찾아갔다. 미군을 이를 듣고 나서, 거의 다 과거의 일로 치부했다. 대신, 이 일의 권한이 이제 미군에게 있고, 개인이든 군중이든 제주인들이 일본인과 충돌을 일으켜서는 안 되며, 일본인들이 귀환할 때까지 인내하라고 말했다.
언어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 현대사의 비극
미군 문서와는 달리 제주 주민들과 일본인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특히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요새를 구축한 지역에서는 갈등이 더욱 심했다. 일본군은 해안 곳곳에 굴을 파 특공기지를 설치하고, 산봉우리에는 토치카를 세우고 갱도를 뚫었다. 이처럼 고된 군사시설 공사에는 제주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이미 많은 젊은이가 징용된 뒤였기 때문에 노인들까지 작업에 끌려갔다. 피해는 노동력 동원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군은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강제로 거두어 갔고, 주민들이 기르던 소와 돼지는 도축장으로, 말은 건설 현장으로 끌고 갔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의 동원과 공출에 협력한 사람들이 주민들의 미움을 산 것은 당연했다.
1945년 12월 12일, 서귀포 중문리에서 마을 사람들이 면장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면장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과 강제공출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정치단체와 무관한 이 사건을 “riot(폭동)”으로 규정하고 진압대를 파견했다. 현장에 출동한 미군은 달아나는 주민들에게 한국어로 멈추라고 명령했으나 듣지 않았다. 결국 미군은 주민들의 머리 위로 사격하라고 명령했고, 낮게 발사된 총알 한 발에 주민 한 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미군은 정확하지도 신뢰하기도 어려운 통역에 의존한 채 일본군과 제주 주민 사이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성급하게 판단한 것은 아니었을까. 왜곡된 통역과 불완전한 의사소통 속에서 미군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 이러한 불통이 남긴 좌절과 비극의 깊이는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벌어진 수많은 참혹한 사건이 증언하고 있다.
1945년 제주에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는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군사적 절차가 마무리되었다고 해서 제주 주민들이 겪은 식민 지배의 상처까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의 강제동원과 강제공출로 쌓인 주민들의 고통과 분노는 미군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고, 미군은 제한된 정보와 불완전한 소통을 바탕으로 제주 사회를 판단했다. 따라서 제주에서 맞은 광복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항복문서와 군정 기록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사라진 주민들의 경험과 목소리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식민 지배의 상처를 제대로 마주하고 이를 청산하려는 노력까지 이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광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