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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 현장
동아시아에서 바라본 러시아의 문명 인식과 유라시아 질서
  • 이주연 국제관계연구소 연구위원
제13회 동아시아 슬라브·유라시아 학술회의 참관기
 
 
동아시아를 기반으로 확장하는 슬라브·유라시아 연구
 
지난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일본 후쿠오카에서 제13회 동아시아 슬라브·유라시아 국제학술대회(이하 EACSES)가 개최되었다. EACSES는 한국·중국·일본 등 동북아시아 3국의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출범했다. 이후 몽골, 대만,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 참여 범위가 확대되면서 국제적인 학술회의로 성정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한국·중국·일본이 매년 번갈아 개최했으나, 2024년 한국 대회 이후부터는 격년제로 운영하고 있다. 
EACSES는 동아시아에서 개최되는 슬라브·유라시아 지역 연구 분야의 대표적인 국제학술회의다. 정치, 경제, 문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 성과가 발표된다. 슬라브·유라시아 지역은 동아시아와 지리적으로 멀고 직접적인 접점도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지역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열정과 노력은 물리적 거리를 무색하게 할 만큼 뜨거웠다.
 

‘루스키 미르’와 러시아의 대외정체성
 
이번 EACSES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패널은 <제국주의적 서사와 세계적 야망: 러시아의 국내외 이데올로기 전략>이었다. 이 패널에서 연구자들은 러시아의 대외정체성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특히 러시아 국경과 영토를 인식하는 방식이 다른 나라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했다. 발표자들은 ‘러시아는 자국의 문명적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을 사실상 자국의 국경과 영토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러시아의 대외 인식을 ‘루스키 미르(Russkiy Mir, Русский мир)’ 개념으로 설명했다.
 
루스키 미르는 언어·문화·역사·종교를 공유하는 거대한 공동체 개념이다. 러시아의 문화적 영역을 법적 영토보다 넓게 해석하고, 옛소련 지역을 자국의 지정학적 영향권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이를 바탕으로 소련 붕괴 이후 옛 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러시아어 사용 주민과 문화·정교회·역사 등을 공유하는 집단을 자국민처럼 보호한다는 논리를 구축해 왔다. 동아시아 지역 연구자들은 이러한 문명주의 관점에 주목했다.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가 돈바스, 크림반도, 쿠릴열도 등 현재 진행 중인 영토 분쟁에서 쉽게 협상하거나 영토를 포기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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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슬라브·유라시아 국제학술대회(출처: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한국 연구기관의 참여와 재단의 과제
 
이번 학술대회에는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경북대학교 러시아유라시아연구소 등 국내 주요 연구 기관이 참여했다. 재단은 별도의 패널을 구성하지 못했으며, 필자만 연구 지원을 받아 참관 형태로 참석했다.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는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을 역사, 문화, 언어 등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발표는 일본, 중국,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 여러 지역에서 온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심도 있는 질의와 의견 교환으로 이어졌다.
 
필자는 학술회의에서 오간 치열한 논쟁과 토론을 지켜보며, 향후 연구 방향과 재단의 역할에 관한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러시아 엘리트층의 대외정체성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최근 러시아의 돌발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들은 기존의 사회과학적 패러다임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역사, 문학, 문화 등 인문학적 토대 위에서 러시아의 대외 인식을 심층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둘째, 문명 충돌 담론을 동아시아의 분쟁 구조 분석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문명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는 만큼, 이러한 방법론을 동아시아의 잠재적·실질적 분쟁 구조 분석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셋째, 재단 차원의 지속적인 학술 네트워크 구축과 정식 패널 참여가 필요하다. 동아시아의 슬라브·유라시아 연구자들과 꾸준히 교류하고 학문적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 향후 개최되는 EACSES에는 재단이 정식 패널을 구성해 참여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번 학술회의는 동아시아에서 슬라브·유라시아 지역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구해 왔는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동시에 러시아의 대외정체성과 문명주의적 세계관을 동아시아의 역사·영토 문제와 연결해 검토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재단 역시 이러한 국제적 연구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연구의 외연과 학술 네트워크를 넓혀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