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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의 발견
격변기 한중 관계의 기록 『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 김형종 서울대학교 역사학부 명예교수
2012년부터 발간된 동북아역사 자료총서 『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7』「갑신정변」 편이 2025년 12월에 출간되었다. 이 번역 자료집의 원전은 타이완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당안관에 소장된 19세기 후반 이후의 외교문서 가운데 한·중·일 3국 관련 자료를 골라 주제별로 정리한 것이다. 총 11권 7,300여 쪽(자료 4,300건, 색인 1권)의 방대한 분량이며, 대한제국 성립 이전 시기가 5/7, 그 이후 시기가 2/7 정도를 차지한다. 따라서 근대 한중 관계사나 동아시아 근대사, 국제관계사 연구에서 이 자료집의 가치는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지금까지 번역된 내용은 주로 조선과 청의 통상·외교 교섭과 국경 회담, 조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관한 내용이었고, 조선과 청 사이에 1882년 의정(議定)된 ‘중국·조선수륙무역장정’ 관련 부분은 현재 번역이 진행 중이다. 
 
『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7』
 『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7』(갑신정변 편)
 

근대 한중 관계의 실상
 
조선은 청일전쟁 전까지 청과 불평등한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를 사대-자소 관계로도 표현하는데, 이것은 일방적인 지배·통치와 예속·복종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고, 상대방의 존재와 역량의 불균형에 대한 일정한 이해 속에서 서로 예의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일종의 ‘타협적인’ 역사적 관계였다. 보통 조선의 일방적인 ‘사대’에만 주목하지만, 사실 여기서 청의 ‘자소’라는 반대 측면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점은 이 자료집에 실린 여러 사료가 다양하게 보여준다. 이 자료집의 첫 부분(『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1』)에 수록된 「조선 지방관의 벌목 청구」에 실린 문서들은 함경북도 경원의 지방관이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고 건물 수리용 목재가 필요하니 두만강 북쪽 건너편으로 넘어가서 벌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의 지방관에게 대담한 요청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사안은 청의 황제에게까지 보고되었고, 결국 청 조정의 통보를 통해 이를 고종도 알게 되었다. 고종은 “하찮은 지방 소관이 대담하게도 감히 제멋대로 공문을 보내 월경 벌목을 요청하였으니, 그 무엄하고 거리낌 없는 짓을 따지자면 절대로 용서될 수 없는 범죄”라고 사죄하면서 그 지방관을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이러한 청 조정이나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 모두 ‘해괴한’ 범죄였음에도 불구하고, 청 황제는 조선 지방관의 요청을 과감하게 받아주면서 아예 청 측에서 목재를 직접 벌목하여 넘겨주라는 대범한 시혜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고종은 ‘특별한 은혜를 입게 되었다고 황송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지방관이 월경 벌목을 요청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만주 지역으로의 불법 ‘월경’이 빈번하였던 해당 지역의 특별한 전통과 상황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건물 수리를 마친 조선 지방관이 나중에 청에서 보내주는 목재 수령을 거부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당혹스러운 이 에피소드는 사대-자소 관계가 일방적인 통치나 통제, 강압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후에도 청은 조선에 대해 가능한 한 작은 나라를 어여삐 여기는 ‘자소(字小)’ 원칙을 유지하는 ‘천조상국(天朝上國)’의 모습에 집착하였다.
 

근대 한중 관계의 변모와 임오군란·갑신정변
 
근대 이후 이러한 양국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다. 19세기 후반 서구 세력의 진출과 더불어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점차 중국 중심의 천하 질서에서 만국공법의 조약 체제로 전환하면서 청도 더 이상 천조상국의 존엄을 그대로 내세울 수 없게 되었다. 동등한 주권을 지닌 국민 국가의 평등한 관계를 내세우는 조약 체제는 그런 것을 아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은 조선에 대해 ‘속국(속방)의 내정·외교 면에서의 자주’를 누차 확인하였던 종전과 달리, 1870년대 후반 이후가 되면 적극적 간섭주의를 채택하여 조선을 사실상 근대적 ‘보호국’으로 개편하고자 하였다. 적어도 조선에 관해서는 여전히 중국 중심의 천하 질서를 고집하였다.

이러한 변모 역시 지금까지 번역한 자료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이를테면 1876년 일본과의 조약을 시작으로 조선이 구미 각국과 체결한 조약 대부분은 청의 종용 또는 개입을 통해 이루어졌고, 청은 조약을 비준하는 과정에 조선이 청의 ‘속방(속국)’임을 알리는 이른바 ‘속방조회(屬邦照會)’를 끼워 넣고 각국에 통보하게 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상국의 지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 하였다. 하지만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는 ‘조약’의 효력과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인정하는 조회의 법적 지위는 아주 크다. 만국공법상 오로지 독립국만이 체결할 수 있는 수호통상조약(이를테면 조·미조약)에 ‘속방조회’를 끼워 넣는 시도는 서구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한 행위였다. 청은 조선에 대해 최후까지 그 ‘체면’을 유지하려 하였지만, 이것은 이후 양국 관계가 종전의 우호적 분위기와는 달리 갈등과 상호 불신으로 가득 채워지면서 크게 뒤틀리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조선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사대의 예의를 갖추면서 청과 협의하여 외교권을 행사하려 하였으나, 그렇다고 일본 및 서구 각국과의 조약으로 이미 확보한 자주권이나 독립국의 지위를 포기할 의사는 없었다. 
 
淸季中日韓關係史料
 『청계중일한관계사료』의 첫 페이지
조선 지방관의 벌목 요구에 대해 길림장군이 총리아문에 보고하는 자문
 
 
이러한 조선의 의도를 청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특히 1880년대 이후 청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청일전쟁 직전까지 직접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내정에 적극 개입하여 통제하려는 강경 자세로 나섰다. 이를 통해 청은 서구와의 대결에서 패배하여 느꼈던 좌절감에서 벗어나 상당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동태는 『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6·7』에 잘 나타나 있는데, 임오군란(『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6』)이나 갑신정변(『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 7』)과 같은 조선 정세의 급변 상황에서 청은 일본을 제치고 조선에 대한 우위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임오군란 당시 청의 주도적 출병(일본과 연결된 전보를 통해 청은 사태를 파악하여, 조선 정부의 요청이 없는 상태에서 우연히 톈진에 있었던 김윤식과 어윤중의 요청에 따라 근대 최초의 국외 출병을 결단하였다)과 반란 진압, 대원군 납치와 국왕 권력의 회복이라는 경과를 보면 그 점은 두드러진다. 김윤식 등을 통해 확보한 정보를 통해 청이 사실상 조선 출병 이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대원군을 반란 수괴로 몰아 모든 책임을 물리는 방식으로 처리하면서 상국이 책봉하였던 국왕의 위상을 복원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출병을 합리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에서도 그와 관련된 개화파 인물이 대거 정치 무대에서 제거되는 바람에 조선의 관련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아주 적은 반면, 이 자료집에서는 갑신정변의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경과, 청의 상황 파악과 개입 결정, 거기에 드러나는 조선 정책의 착안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 국왕이나 관료의 구체적 대응이나 청군의 실제적인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이 자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청은 조선을 통제하면서 일본과의 충돌을 회피하는 데 우선성을 부여하였으므로, 사태 해결 과정에서 조선의 외교적 이익은 그다지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또한 위안스카이가 무리하게 출병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후 외교적 협상에서는 근대적 외교 기술을 장착한 일본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는 어설픈 모습을 보여주었다. 청이나 일본의 자료와 비교해 볼 때 외교 문제에 관한 조선 정부의 정책 형성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는 유감스럽게도 아예 남아 있지 않다시피 하므로, 이런 점에서 번역본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편은 이 두 사건의 이해나 조선 정세의 파악에 폭넓게 활용될 필요가 있다. 
 

『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의 효용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자료집의 이용에는 몇 가지 큰 난관이 있었다. 우선은 방대한 분량의 한문-원 필사본을 축소 영인하였는데, 원문을 해독하기도 어렵고 오·탈자도 적지 않다-인 데다가, 공문(청대의 당안) 형식에 맞추어 그 용어나 구조, 문서 인용 방식-화자의 위치와 직무와 역할 및 그가 주고받는 문서의 상하 전달 관계-이 아주 복잡하게 구성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 한문이나 청대 관료·외교 제도에 대한 지식을 갖추더라도 일정한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이 자료집을 제대로 읽고 활용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난관을 벗어날 수 있는 편의적인 도구를 제공하려는 점에 이 방대한 자료집의 번역이 시작된 동기가 있었고, 이 점이 제대로 충족될 수 있다면 이 자료집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원문에 구두점을 찍고, 누가 화자이며, 그의 발언이나 문서 인용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알려주는 단락이나 부호를 첨가하고, 가능한 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상세한 주석을 추가하고자 하였지만, 제한된 시간과 인력, 원고 분량으로 그러한 의도가 충분히 관철되지 못한 점은 약간 아쉬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