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이탄광=‘조선 탄광’
조세이탄광(長生炭鑛)은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에 위치한 해저탄광이다. ‘조선 탄광’이라 불릴 정도로 조선인 노동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야마구치현 내 다른 탄광의 조선이 노동자 비율이 10% 내외였던 것과 달리, 조세이탄광에서는 전체 노동자의 약 75%가 조선인이었다.
당시 조세이탄광은 작업 환경이 특히 가혹하고 위험하다는 소문이 퍼져,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기피 대상이 되고 있었다. 해저 깊숙이 내려가야 하는 작업 특성상 붕괴와 침수 위험이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탄광 회사는 비교적 임금이 싸고 정보 접근이 제한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동원했다.
‘모집’이란 이름의 강제동원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조세이탄광은 총 1,630명의 조선인 동원 계획을 세웠고, 1941년 10월 말까지 실제로 1,162명을 동원했다. 이들은 ‘모집’이라는 형식으로 동원되었다. 일본 정부는 국민징용령에 따른 ‘징용’만이 강제성이 있지, ‘모집’이나 ‘관 알선’에 따른 동원은 강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2023년 5월 19일 일본 역사학계의 대표적인 단체인 역사학연구회는 성명을 통해, ‘모집 방식은 3단계지만 모든 단계에서 조선총독부와 경찰의 관여하에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적인 동원이 이루어졌고, 엄중한 감시 체제하에서 가혹하고 위험한 노동을 장시간 강요당했으며, 민족 차별이 존재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학술 연구로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가 이러한 성과를 무시하고 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왜소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 역사학연구회 성명(2023.5.19.)
‘모집’은 원래 개인의 자유의사를 존중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방식이었으나, 실제로는 동원 단계에서부터 ‘도주’가 끊이지 않았다. 일본 경찰이 발간한 『특고월보(特高月報)』에는 1939년 10월 조세이탄광으로 동원된 238명 가운데 17명이 도주했고, 추가로 2명은 도주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사무소에서 구타를 당한 것을 계기로 충돌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회사 측에서 작성한 자료에도 조선인 노동자가 도주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조세이탄광 측에서 작성한 조선인 노동자 ‘도망’ 관련 기록
동원된 82명 가운데 “입소식 전 도망 13명”이라는 기재가 있음
출처: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 『フィールドワークハンドブック』
통제된 일상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 노동자들의 생활 환경은 사실상 감금 상태였다. 독신자들은 기숙사에 집단 수용되었는데, 기숙사 외곽에는 3미터가 넘는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출입구는 단 하나뿐이었다. 건물 구조는 ‘입 구(口)’ 자 형태로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했고, 항상 감시원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세이탄광의 합숙소
출처: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 『フィールドワークハンドブック』
예견된 참사, 은폐된 책임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발생했다. 1941년 12월 7일(미국 현지 시각 8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자, 일본 정부는 석탄 생산을 전시 경제의 핵심 과제로 삼는다. 정부는 각 탄광에 증산을 강하게 요구했고 기업들은 이에 응답하기 위해 안전보다 생산량을 우선시했다. 조세이탄광은 원래부터 위험성이 높았던 해저 탄광이었음에도 무리한 채굴을 강행했다.
해저 탄광의 경우 바다 밑과 일정 거리 이상을 유지하지 않으면 갱도가 붕괴될 위험이 크다. 일반적으로는 해저 40미터 이하에서 작업해야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조세이탄광은 30미터 전후까지 갱도를 파 내려갔다. 당시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작업 중 바다 위를 지나는 어선의 엔진 소리가 그대로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붕괴를 막기 위해 남겨두어야 할 석탄 기둥마저 제거했다는 점이다. 석탄 기둥은 갱도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안전장치였지만,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이것마저 캐냈다. 전후 재판 과정에서 탄광 경영자는 이러한 작업이 법률을 위반한 것이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는 한 기업의 과실을 넘어, 전쟁 수행을 위해 인간의 생명과 안전보다는 석탄 생산을 우선시한 국가 정책의 결과였다.
결국 1942년 2월 3일, 바닷물이 순식간에 갱도로 유입되는 수몰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바다 밑 갱도에서 작업 중이던 183명이 탈출하지 못한 채 희생되었다. 이 가운데 136명, 약 74%가 조선인이었다.
조세이탄광 배치도
출처: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www.chouseitankou.com)
사고 직후 추가 피해를 막는다는 이유로 갱구는 신속하게 봉쇄되었고, 생존자 구조나 정확한 사고 원인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언론은 전쟁 중이라고는 하나, 183명이 희생된 대형 사고였음에도 아주 짧게 단신으로 보도하는 데 그쳤다. 이렇게 사건은 은폐되었다.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없었다. 무엇보다 많은 희생자 유족에게 사고 사실조차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시민의 책임과 연대
1945년 패전 이후 조세이탄광은 폐광되었고, 수몰사고로 사망한 이들의 유해는 바다 밑 갱도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희생자들의 이름도, 왜 그들이 그곳에서 죽어야 했는지도 기억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베 지역 시민들이 망각의 늪에서 진실을 건져 올렸다.
1976년, 향토 사학자 야마구치 다케노부는 조세이탄광 수몰사고와 조선인 희생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사회에 알렸다. 그의 문제 제기는 지역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이후 뜻을 함께하는 시민들이 모여 1991년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하 ‘모임’)을 결성하게 된다.
69주년 추모집회에 참석한 유족들과 이를 뒤에서 지켜보는 야마구치 다케노부(2011.1.29.)
출처: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 『フィールドワークハンドブック』
이 ‘모임’이 만들어진 계기는 1982년 탄광 부지에 세워진 ‘조세이탄광 순난자의 비’였다. 이 추모비에는 “편안히 잠들라, 탄광의 남아여”라는 문구만 새겨져 있을 뿐, 조선인 희생자와 강제동원의 역사적 배경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시민들은 이 침묵이 또 다른 폭력이라고 느꼈다. 희생의 구조를 가린 채 애도만을 말하는 것은, 진정한 추모가 아니라는 비판이었다.
조세이탄광 순난자의 비
출처: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 『フィールドワークハンドブック』
‘모임’은 선언문에서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과 왜 아직도 많은 조선인이 바다 밑에 잠들어 있는지 그 역사적 경위를 사죄의 의미를 포함해 역사에 새기고자 한다”라며,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일본인이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라고 밝혔다.
이후 ‘모임’은 구체적인 실천에 나섰다. 피해자 전원의 이름을 밝히기 위한 명부 조사, 탄광 환기·배수 시설인 ‘피야’ 보존, 생존자와 지역 주민 증언 수집 및 기록화 작업이 이어졌다. 특히 창씨개명된 명부 속 이름을 하나하나 추적해 본래의 한국 이름을 복원하는 작업에는 오랜 시간과 큰 노력이 필요했다. 그 결과 136명 가운데 5명을 제외한 모든 희생자의 한국 이름을 찾아냈다.
그리고 희생자 앞으로 ‘사망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118통 발송했는데, 17통의 답장이 있었다. 다음 해인 1992년 3월에 한국에서 ‘일본 장생탄광 희생자 대한민국 유족회’가 결성되었고, 1993년부터 매년 2월 한국 유족을 초청하여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오로지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연대로 이루어졌다.
과거를 마주하는 용기와 행동
2013년에는 1,600만 엔을 모금해 염원이었던 추도비를 건립했다. 추도비에는 ‘강제연행’이라고 확실하게 새겼다. 추도비 건립은 모임의 하나의 이정표였지만, 시민들의 노력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유족들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이름이 새겨진 비석만이 아니라, 바다 밑에 남겨진 가족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도비에 헌화하는 박지향 재단 이사장(2025.11.)
2024년 2월 3일 열린 82주기 추도식에서는 “매몰된 갱의 입구를 시민의 힘으로 열어 유골의 존재를 분명히 하자”고 결정하고, 7월 15일부터 갱구 발굴과 잠수 조사를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마침내 9월 25일 노동자들이 드나들었던 갱도의 입구를 열었다. 이어진 잠수 조사 끝에 2025년 8월 25일에는 마침내 희생자 유골을 바닷속에서 인양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모금에 동참했고, 한국 잠수부들도 참여해 발굴 작업은 국경을 넘어선 연대의 장이 되었다.
갱구 발굴을 시작하다(2024.9.24.)
83년 만에 바닷속에서 수습한 유골에 관해 설명하는 이노우에 요코 ‘모임’ 공동 대표(2025.8.26.)
오는 2월 유골 조사 및 인양이 재개될 예정이다(2026.2 행사 포스터)
출처: 長生炭鉱の水非常を歴史に刻む会(www.chouseitankou.com)
지난 1월 13일 개최된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유골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협력을 요청했다. 양국 정부는 유골의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감정을 추진하기로 하고, 구체 사항에 대해서는 당국 간 실무적 협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희망이 현실이 되다
‘모임’을 이끌어 온 이노우에 요코 공동 대표는 2019년 2월 28일, “유족이 가장 원하는 것은 유골을 유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라며, 이것은 “일본 정부와 일본인이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현지를 방문해서 희생자를 위해 꽃 한 송이 올려 준다면 반드시 커다란 계기가 마련되고 희생자와 유족에게도 희망과 힘을 줄 것”이라는 편지를 청와대로 보냈다. 그와 ‘모임’이 내걸었던 목표가 이제 조금씩 현실이 되고 있다.
조세이탄광 수몰사고의 진상을 밝히고 유골을 유족에게 돌려주려 애써온 ‘모임’의 활동은 어두운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과거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함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조세이탄광 수몰사고에 관한 한국 정부 차원의 조사․연구로는 허광무, 『일본 조세이(長生)탄광 수몰사고 진상조사』,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2007가 있다. 이 글도 이 보고서를 참고로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