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봄은 설레는 계절이지만, 역사학도에게는 조금 더 특별하다. 따사로운 햇볕 속에서 새 학년, 새 학기를 맞이하는 미묘한 떨림을 안고 답사를 떠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남도로 떠나는 답사라면 기대는 한층 배가된다. 이 모든 기대감을 품고 전남 순천을 찾았다.
순천은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도 전체 면적의 약 70%가 산지로, 전라남도에서 산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각국사 의천이 불법을 전파했던 선암사와 삼보사찰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송광사 등을 품고 있다. 또, 순천만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이름난 생태공원으로 발돋움하여 많은 이들이 순천을 찾고 있다. 이처럼 순천의 아름다운 자연은 오늘날 순천 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이런 환경 때문에 수모를 겪어야 했다.
남해 바다와 접한 순천은 고려 말부터 이미 왜구침입이 잦아서 많이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는 임진왜란, 그중에서도 남도 일대가 왜구에 유린당한 정유재란 때였다. 전남 지방 여러 곳에 쌓은 왜성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순천왜성과 이 성을 마주하고 있는 검단산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순천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지다.
순천왜성 축성에 동원당한 조선인들의 심정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순천왜성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중에 왜군이 축성한 성이다.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의 군대는 1597년 7월부터 전라도를 휩쓸고 북상했으나, 조명 연합군이 반격해 오자 여기에 밀려 일부가 북상하고 나머지는 남쪽으로 회군하였다. 이 때 순천으로 남하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1597년 9월부터 3개월에 걸쳐 쌓은 것이 순천왜성이다. 바로 이곳에서 왜군과 조명 수륙연합군 사이에 최후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순신이 이곳에서 본국으로 퇴각할 준비를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임진정유 7년 전쟁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이처럼 순천왜성은 왜군에게 호남 지역을 공략할 거점이자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목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때문에 3개월만에 축조한 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견고하게 지어졌다. 3만 6천여 평 면적에 본진 3첩, 내성 3첩, 외성 3첩 등 총 9첩으로 이뤄져 있는데, 우리나라가 성벽을 한 겹으로 축성한 것과 달리 순천왜성은 바다에 면한 본성을 중심으로 외곽을 세 겹 두른 형태다. 또, 성곽을 일렬로 축조하지 않고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통로를 꺾어놓았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 육지로 이어진 서쪽에는 해자를 파서 바다와 통하게 하고 해자 바깥쪽에는 목책도 설치했다고 한다. 왜군이 순천왜성 축성에 얼마나 공을 들였으며, 또 짧은 기간에 이 정도 규모로 강고한 성을 완성하는데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수고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우리가 순천왜성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곽 일부와 천수각의 기단,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주요 출입문인 문자 등이다. 주변 환경이 많이 달라져서 명량해전 당시 바다와 연결되어 있던 곳은 이제 산업단지 조성을 위해 매립되었고, 바다와 이어질 정도로 깊었다던 해자는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본래 순천왜성에 있던 천수각은 3층 건물로 지어졌다는데, 현재는 기단만 남아 있으나 그 위에 오르면 멀리 공업단지와 그 뒤의 바다가 보인다.
그동안 사학과에서 여러 번 답사를 다니며 배운 것은 당시 환경,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처지와 상황을 생각하며 그들 눈으로 답사지를 둘러보는 게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바로 근처 바다에 500여 척 배를 정박시켜 놓고 이 천수각 위에서 전투와 퇴각을 준비했을 왜군, 당시로서는 고층 건물이었을 천수각을 바라보던 조선 백성들의 심정, 그리고 이곳에 숨어 있는 적들과 일전을 각오해야 했던 조선군에게 순천왜성은 어떻게 보였을 지. 청명한 하늘 밑 기단 아래로 펼쳐진 푸른 초원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았던 순간이다.
전쟁의 치열함과 결연함, 그리고 처연함
순천왜성 서쪽 인근에는 또 다른 산성인 검단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검단산성은 6세기 말~7세기 초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이 지역에서 처음 조사된 백제시대 석성이다. 지금은 정상에 모인 기왓장들과 수풀 사이로 보이는 성벽의 흔적만 남아 순천왜성에 비해 눈에 띄지 않지만, 정유재란 당시 이 산성을 중심으로 명나라 제독 유정이 이끄는 명군과 도원수 권율이 지휘하던 조선군이 포진하여 순천왜성에 있던 왜군과 대치하였다. 여기에 순천 앞바다에 명군 도독 진린과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합세한 조명 수륙연합군은 여섯 차례에 걸쳐 순천왜성을 점령하기 위한 합동작전을 펼쳤다. 당시 모습은 명나라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도 남아있는데, 그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로 만든 병풍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따스한 봄기운 속에 찾은 순천은 초록빛 산지와 순천만이 자아내는 아름다움, 그리고 남도 특유의 풍요로운 맛으로 매력을 뽐낸다. 하지만 그 화려한 이면에 담긴 백제의 흔적과 고려 불교가 남긴 유산, 조선시대의 흔적에도 주목해보자. 전란의 마지막 전투가 치러진 순천왜성과 검단산성은 전쟁의 치열함과 결연함, 그리고 처연함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