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한국학 연구자들이 배출되는 배경은 해방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로를 따라 변화해 왔다. 처음에는 미군정 시기 이후 군대의 일원으로 왔던 이들과 주한미군으로 주둔했던 이들이 한국학 연구를 시작하였고, 뒤이어 선교 활동을 왔던 모르몬 교인들과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활동했던 이들이 한국학 연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미국 교육 시스템하의 재미 한인들과 한국인들이 주요한 한국학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 연구에 치중했었던 학자들 역시 동해를 건너 한국학 연구에 진입하게 되었는데, 나의 경우는 이에 해당된다. 나는 영어 강사로 활동하면서 처음에는 아시아 중 일본 연구에 관심을 두었고, 그 후 1991년에 이르러서는 연구자로서의 삶에 획기적인 활력을 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전문적인 아시아학자로서 나의 삶을 재창조하는 변혁은 동북아의 핵심이라 겨지는 한반도 문제를 연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연구가 대부분 개인적인 경험에 관련되는 것처럼, 나의 연구 역시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이 반영된 것이다. 나의 첫 번째 연구과제는 일제하의 식민지 동화정책에 관한 것이었다. 이 연구를 통해서 일본인들이 다른 국가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이식하려 했던 방법 중 한국의 경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현재 일본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 정서가 형성된 역사적인 계기는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도입하였던 ‘동화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동화정책이 꾸며냈던 여러 가지 수사(修辭)들은 항일운동을 하던 이들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일본의 문화가 어느 정도는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을 통해 고찰한 결과, 일제의 동화정책의 정치적 수사와 실제 정책간의 괴리가 너무 커서 많은 친일 조선인들이 불만스러워 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동등한 지위를 지니게 될 것이라는 친일 조선인들의 기대와 관련이 있다. 동화정책에서 제시했다고 주장하던 ‘동등한 지위로의 격상’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실제로는 그 증거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드물었다. 따라서 내선일체의 동화정책은 친일 조선인의 기대만큼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판단된다. 즉 35년간의 식민지 통치기간 동안 일본인들은 내선일체에 대한 진정한 의지 없이, 단지 외피(外皮)의 수사(修辭)만을 조선인들에게 제시했던 것이다.
두 번째 연구과제는 예전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잠시 체류했을때 추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첫 번째 연구과제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일본의 동화정책이 한국의 식민지역사에서 어떻게 작동되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식민지 시기에 항일하던 그리고 친일하던 이들을 분열시켰던 일본의 동화정책 중 어떤 부분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잔재로 남아 한국인들을 분열시키고 있는지? 도대체 무엇이 한반도에서 식민주의의 망령이 여전히 살아있도록 만드는 것인지? 해방 이후 한국의 사회 정치적 구조의 형성에 이 흔적들이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미국의 군사 점령 정책이 어느 정도까지 식민 잔재를 강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는지?
나는 아직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서 충분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동북아역사재단에 머물게 된 최근 한 달 동안 나는 향후 지속적으로 이 연구를 추진하고 새로운 과제를 개발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각과 동력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준 김민규 박사에게 감사드리며, 서종진 박사, 케네스 로빈슨 박사, 그리고 재단의 다른 연구자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내가 그들과의 토론에서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식민지 잔재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많은 세미나에서는 여전히 일제 식민통치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길거리에서는 일본에 관련된 시위들이 종종 벌어지고 있으며, 대중매체는 수시로 이것을 중요한 문제로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은 두 나라가 진정으로 화해하는 날이 도래할 것을 기대하겠지만, 요즘처럼 불협화음을 내는 일이 정치적으로 자주 시도되는 분위기에서는 빠른 시간 내의 화합이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연구가 앞으로 한일 양국의 상호간 진정한 이해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영미 박사, 영문 국역)
내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은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 초에는 한국에서 공부하는 중국 유학생들이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짧은 기간 어학연수를 마치고 바로 대학원에 입학해 한국사를 전공하겠다는 결정은 나 자신에게 상당한 도전이었다. 다행히 나는 많은 인내심을 가지고 내 학업에 관해 열정적으로 조언해주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교수님들을 고려대학교에서 만났다. 나는 교수님들과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중국 북동지방과 내몽고에 위치한 사적지들을 여러 차례 견학하면서 한국 고대사를 공부하도록 자극받기도 했다.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나는 다시 더 큰 도전을 하기 위해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언어장벽과 문화적인 충격은 내게 늘 문제가 됐지만, 늘 교수님들과 선배님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동아시아 및 한국 역사를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을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더욱 사색적이고 미묘한 시각차를 갖고 다시 숙고했다. 그렇게 나는 박사과정을 마치고 2006년부터 로어노크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로어노크 대학에 몸담으면서 한국 역사에 대한 내 열정은 커져만 갔다. 내가 (교수채용에 응모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이 대학을 방문했을 때 사학과 학과장이신 마크 밀러 박사님은 내게 김규식이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물으셨다. 물론 나는 한국 근대사에 관한 책들에서 그 이름을 본 적있었다. 하지만 김규식이 중국으로 추방당했던 동안 한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1945년∼1950년간 남북한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잘 몰랐다. 나는 로어노크 대학으로 이사온 다음에야 학교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과 학교가 1890년대부터 맺기 시작한 한국과의 인연에 대해 알게 됐다. 미국 버지니아주 남서쪽에 자리한 이 작은 문과 대학(이 대학은 요즘에도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미국 학생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학이다)이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미국에 유학 온 한국 학생들 중 30여명이 공부하고 돌아갔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학교였다는 점이 놀라웠다. 두 가지 측면에서 특히 놀라웠다. 첫 번째는 로어노크 대학이 태평양 건너 수천 마일 떨어진 대륙에 있는 나라, ‘은자의 왕국(hermit kingdom)’으로만 알려졌던 한국이라는 곳에서 온 학생들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한국 유학생들이 학업 성적만 우수했던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수의 교내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로어노크 대학 졸업생 중 유명한 한국인을 꼽자면,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이강(의친왕), 1897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학사학위를 받았고 1893년 세계 컬럼비아 박람회에서 한국어 통역관으로 활동했던 서평규, 1897년 명예석사학위를 받은 한국 개화운동의 주축 서광범이 있다. 또한 1907년 고종 임금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세 명의 특사 중 한 명이었던 이위종의 형인 이기종은 그들의 아버지 이범진이 미국 워싱턴에 주미 공사로 근무하던 동안 로어노크 대학에서 공부했다.
나는 지난 5년간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이런 나에게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연구할 시간이 주어진 것은 예전에 알고 지내던 학자들과 다시 만나 교류도 하면서 한국 역사학계에서 전도가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새로이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재단이 보유한 고대사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던 것도 내게는 큰 수확이었다. 로어노크 대학 도서관도 좋지만, 동아시아 관련 자료의 범위가 매우 한정되어 있고 동아시아 언어로 집필된 자료가 아예 없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보낸 석 달 동안 나는 가장 최신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재단에서 보낸 연구기간을 바탕으로 향후 한국의 학자들과 공동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나는 2014년 5월 로어노크 대학 학생들을 인솔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는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고, 다시 그 인연의 끈을 잇고자 하는 로어노크 대학으로서도 역사적인 일일 것이다. 나는 미국 학생들이 역사와영토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들을 파악하고 동아시아에서 진행중인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동북아역사재단, 특히 독도체험관을 학생들과 함께 방문할 것이다. 재단 방문 덕분에 내년으로 예정된 나와 학생들의 한국방문이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