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의 조사와 통계』(일제침탈사 연구총서48)-
이 책은 지난 2022년부터 간행된 재단 ‘일제침탈사 연구총서’ 시리즈 중 하나다. 제목 그대로 식민지 침략과 지배 과정에서 조선총독부가 수행한 각종 조사와 총독부가 생산한 통계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다만 토지조사와 임야조사 등은 총서의 다른 책에서 다루게 되어 이 책에서는 빠졌다. 전시(戰時)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을 위한 각종 조사도 다른 책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이 책에서는 조사의 내용보다 방법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을 언급하는 데 그쳤다.
침략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조사
조선은 19세기 말까지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으므로, 조선에 대해 외부에 알려진 정보도 거의 없었다. ‘이양선’을 몰고 와서 개항을 요구하려던 열강 세력들은 조선의 해안에 접근하기 위해 수로 측량부터 해야 했다. 그런 중에도 일본은 개항 직후부터 육군 측량부 간첩대를 파견해서 비밀리에 조선 내륙을 탐사하고 군사지도를 작성했다. 조선을 정복해서 식민지로 만들고 지배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자연과 사회 전반에 대해 더 많은, 더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장악한 상황에서 통감부를 설치한 일본은, 이후 토지조사, 인구조사(민적조사), 관습조사와 각종 자원조사 등 조선에 대한 온갖 조사로 식민지화의 길을 닦았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그런 조사는 식민지 지배의 대상이자 기반이 되는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자유주의경제 시대로 접어들면서 서구 각국은 자국과 외국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통계’라는 형태로 쏟아내고 있었다. 중상주의 시대까지 비밀에 부쳤던 각국의 인구와 경제, 군사력에 대한 정보가 대량으로 공간(公刊)되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한 국제적 비교도 유행하였다. 이를테면 지금 우리가 OECD 통계에서 한국의 교육적 성취와 청소년의 행복감, 코로나 극복에 대한 성취 등을 가늠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체제에서 조선총독부의 조사는 단순히 세금을 부과하고 식민지의 자원을 개발・착취하기 위한 것, 평상시나 전시에 동원할 수 있는 인력과 물자의 양과 소재를 확보하기 위한 것 이상의 일이 되었다. 총독부의 인구조사나 토지조사는 ‘그런 조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조선왕조에 비해 훨씬 더 발전되고 문명화된 통치’로 포장된 총독부 시정 성과의 지표이자 상징이었다. 그렇게 총독부가 열심히 조사해서 자랑스레 간행한 결과가, 현재 남아 있는 『조선총독부통계연보』를 비롯한 『조선총독부시정연보』, 또 총독부 행정의 각 부문별・지방별 통계서와 요람, 잡지 『조선』과 『관보』 등에 실린 각종 통계표, 그리고 토지조사나 국세조사(센서스)의 방대한 보고서 등이다. 어떤 보고서는 멋진 장정에 초호화판 컬러 도판을 자랑한다. 심지어 총독부는 『통계연보』와 『시정연보』의 영어판도 냈고, 그런 통계와 조사의 결과를 요약한 관광용 조선 소개서나 안내서도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식민지기 역사를 연구할 때 이용하는 일차 자료 중 하나는 조선총독부가 공간한 바로 그 통계와 보고서라는 것은 또 다른 역설이다.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작업 결과물인 그 조사와 통계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자료로 쓰지 않을 수도 없다. 누군가는 식민지기의 조사와 통계 자체를 의심하고, 다른 누군가는 남아 있는 통계를 조합해서 당시 현실을 가늠해 보려 하지만, 식민지기의 조사와 통계를 다루는 모든 연구자들은 다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다. 이 책은 당시 조사와 통계의 실상을 살펴보면서, 그런 풀리지 않는 고민을 풀리지 않는 대로 토로하는 전략을 취했 다.
조사와 통계에 숨은 행간 읽기
책은 모두 일곱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은 통감부 시기까지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이루어진 조사를 다룬다. 일본 육군 간첩대의 측량과 지도 작성부터 ‘보호국’ 시기에 이루어진 인구조사, 민사관습조사 등을 내용으로 한다. 조선을 식민지로 장악한 뒤 조선총독부는 일종의 국가권력처럼 행세했으므로, 각종 조사가 침략과 주권 침해의 불법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양상은 오히려 통감부 시기까지의 조사에서 잘 드러난다.
제2장은 조선총독부 행정의 일부인 공식통계 체계와 그 작동에 대한 내용이다. 「보고례」라는 보고 형식에 입각한 조사・통계와 원천적으로 현장조사의 정확성과 원자료의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는 그 체계의 문제점을 다루었다.
제3장에서는 식민지기의 인구조사와 인구통계를 다루었다. 호적제도를 중심으로 한 ‘현주호구’와 국세조사, 그리고 뒤늦게 도입된 인구동태조사의 실상과 빈틈에 대한 내용이다.
전염병 유행 때 병자 색출을 위해 경찰이 시행한 호구조사는 매우 강압적이었다.
『大正八年虎列刺病防疫誌』(1920,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제4장은 조금 다른 데로 눈을 돌려, 한반도의 자연에 대한 조사를 살펴보았다. 당시 모든 조사에 바탕이자 모델이 되었던 자연과학적 측정과 관찰, 조사 절차의 문제, 일본의 연구자들이 한반도의 식물조사를 독점했지만 그들 역시 서구 근대 과학의 위계에서는 종속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지식의 중층적 제국주의의 문제, 한반도의 자연조사에서 조선의 전통 지식과 고문헌은 어떻게 활용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제5장은 중추원과 1920년대 이래 총독관방 조사과와 문서과 등에서 이루어진 조선의 과거・현재의 제도・풍속과 생활조사 등을 다루었다. 그동안 알려진 것과 달리, 사실은 중추원과 총독관방 문서과의 조사 모두 조사 방법이나 사업의 진행이 아주 허술했음을 보여준다.
제6장은 식민지기 조선인의 신체 측정을 둘러싼 세 가지 서로 다른 방향을 짚었다. 하나는 식민지 지배 초기부터 이루어진 체질인류학적 조사를 통해 ‘조선인종’ 또는 ‘조선민족’의 전형, 표준적 모델을 구성하려 한 시도다. 다른 하나는 키와 신체 각 부위의 크기, 지문 같은 신체 측정을 범죄자의 개인식별에 이용하지만 그것으로 ‘범죄인’의 전형을 찾거나 하지는 않는 방식이다. 마지막은 영유아・청소년의 신체 측정으로, 여기서는 각 개인의 측정치가 모여서 그 연령의 발달 상황으로 표준화되고, 개인별 측정치를 계속 그 표준과 비교・추적하게 된다.
제7장은 전시총동원을 위한 자원조사를 비롯해서 식민지기 후반으로 가면서 도입된 실업조사나 가계조사, 농가경제조사 등 다양한 시도와 그 한계를 다루었다.
일본(내지), 타이완, 관동주에 비해 조선의 인구당 경찰력이 상당히 빈약했음을 보여준다.
『소화5년 조선경찰개요』(1930, 개인 소장)
미처 못 다룬 것들
결국 이런 내용만으로도 700쪽 가까운 무척 두꺼운 책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다루지 못한 내용이 많다.
조선총독부 말고도 지방의 도와 부・군, 읍・면에서 만들고 간행한 통계책자나 안내서도 있었고,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상공회의소, 언론사 등 식민지 지배에 일익을 담당했던 민・관의 각종 기관들도 여러 가지 조사를 수행하고 책자를 간행했다. 또 분야에 따라서는 일본제국 정부의 문부성이나 상공성 등에서, 때로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조선의 자료와 정보가 포함된 조사서와 통계서를 내기도 했다. 여러 제국대학의 연구자부터 아마추어 조사자・작가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여행・탐사하거나 조선에 살면서 나름대로 조선에 대해 연구한 글을 남긴 사람도 많다. 식민지를 지배하는 입장에 선 일본인들은 그렇다 치고, 피지배자였던 조선인들은 스스로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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