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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ISSUE
중국이 애국사업 관점에서 기억하는 한국전쟁
  • 손장훈 한중연구소 연구위원

영화 〈명량〉과 한국전쟁

우리나라 국민들이 좋아하는 ‘천만 영화’를 들라고 하면 우리는〈명량〉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16세기 일본의 조선 침공으로 촉발된 대규모 전쟁인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다. 이 전쟁의 이면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그는 전국시대를 거치며 비대해진 다이묘(大名)들의 군사력을 외부로 돌림으로써 자신의 권력에 대한 도전을 막고자 했다.

갑자기 왜란을 언급한 이유는, 전쟁의 손익이 대내적 요인뿐 아니라 대외적 요인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는 한 나라의 경제적 득실이 내수와 경상수지로 구분되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전쟁과 같이 국가 간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상황에서는 보통 대내적 요인이 상대적으로 간과되기 쉽다. 한국전쟁 또한 예외는 아니다.

특히 중국의 경우, 한국전쟁에서 우리와 직접 군사적 충돌을 벌였던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인해전술(人海戰術)’로만 이미지화되어 있다. 1950년 10월, 약 30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참전한 배경 역시 ‘같은 공산주의 진영인 북한 편을 들어 주기 위해서’라는 냉전사관의 연장선에서 단순하게 파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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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9일, 압록강 철교를 넘어 한반도로 진입하는 중공군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2024년 8월 필자 촬영)


그러나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중국에서는 매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1950년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 중국은 항일전쟁과 국민당과의 내전을 연이어 치른 후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1953년 이후, 중국의 국내 정세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같은해, 중국공산당은 ‘과도시기 총노선’을 선포했다. 이는 다른 이념과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고 오직 사회주의만 존중받는 국가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1953년부터 본격적인 공업화와 경제적 근대화를 위한 ‘제1차 5개년계획’을 시작하였다. 1950~1953년까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중국 대륙 내부에서도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종전, 그리고 통일.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국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다. 하지만 정권을 수립한 중국공산당은 통일 중국의 주인이 될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베이징, 톈진, 상하이, 난징 등 당시 국제적으로도 손꼽히는 주요 도시들은 중국공산당이 세력을 키워온 농촌 지역과는 인구의 규모는 물론이고 사회 구성의 다양성, 인구 밀도, 유동성 등 여러 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이 중 중국공산당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된 것은 1949년 이후에도 실질적으로 ‘내전’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제스(蔣介石)가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도주했음에도 중국공산당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반항에 부딪혔다. 국민당은 물론이고 국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신생 정권이 곧 전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중국의 각 성(省)에서는 국민당군의 잔당, 혹은 국민당을 지지하던 민병들의 무장 폭동이 다수 발생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무려 만 명 가까운 병력을 동원하여 행정지구를 포위, 공격하고 중국공산당이 구축해 놓은 정권 체계를 붕괴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1950년 한 해에만 약 4만 명에 달하는 공산당 간부와 정권에 협조적인 민간인들이 살해되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한 최고 지도자들은 이러한 사태의 심각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중국공산당을 공격하는 반혁명 활동을 진압하는 이른바 ‘진반(鎭反: 반혁명 분자 숙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마오쩌둥은 “반동파에 대해서는 폭력만이 있을 뿐이며 절대 인정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호랑이를 때려죽이거나 잡아먹히거나 둘 중 하나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공산당이 반혁명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국민당과 내전 시기 중국공산당은 향후 집권 시 ‘통일전선’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정파와 연합정부를 구성하겠다고 공약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반혁명 세력에 대한 물리적 탄압은 자칫 이념이 다른 정당 및 정치인을 탄압하는 조치로 해석될 위험성이 있었다.


‘항미원조’를 이용한 중국공산당의 반혁명 진압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우리에겐 ‘6‧25전쟁’,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으로 불리는 내전의 시작이었다. 전쟁 초반 북한에 유리하게 진행되던 전세는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완벽하게 반전되었고, 국군은 38도선을 넘어 압록강변까지 북진하였다. 바로 이 때가 중국이 한국전쟁 개입을 결심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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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하는 중국공산당 지도부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2024년 8월 필자 촬영)

 

 

한국전쟁은 중국공산당에게 반체제 세력을 일소할 좋은 기회였다. 마오쩌둥은 당시 공안부장이었던 뤄루이칭(羅瑞卿)에게 “…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으니 이 시기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 반혁명 진압은 아마 이번뿐으로 이후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회이므로 잘 이용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몇 명의 반혁명 분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군중을 발동시키는 것이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심산은 중국공산당 수뇌부의 계획과도 대체로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류샤오치(劉少奇) 역시 “어째서 대대적으로 진반운동을 일으켜야 하는가. 핵심은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다. 항미원조는 진반운동에 이롭다. 왜냐하면 항미원조의 영향력이 매우 위력적이어서 그 파장이 묻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50년 10월 8일 공식적으로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함과 동시에 ‘반혁명 활동 진압에 관한 지시’를 통과시켜 전국적인 규모의 반혁명 진압을 전개하였다.

‘항미원조’를 이용한 반혁명 진압은 잔인한 폭력을 수반하여 수행되었다.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중앙 지도부는 각지의 책임자들에게 상당히 구체적인 살인 지시를 하달하였다. 마오쩌둥은 “일반적인 도시에서는 최소한 인구의 0.05%, 적의 준동이 심각한 곳에서는 0.1%의 처형이 필요하다”라면서, 특히 당시 중국의 핵심 도시인 상하이와 난징의 책임자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상하이는 인구 600만의 대도시인데도 2만여 명을 체포해 200여 명만을 죽였다.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나는 1951년 내 마땅히 죄가 큰 토비 수괴, 악패, 특무 및 회도문 우두머리 등 최소한 3,000명가량을 죽여야 하며 상반기에 최소한 1,500명가량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수치가 적당한지 여부는 심사숙고하기 바란다. 난징 쪽에서는 72명을 죽이고 다시 150명을 죽이겠다고 전보로 알려왔는데 이 수치는 매우 적다. 난징은 50만 인구의 대도시로 국민당의 수도였으므로 죽여야 할 반동분자가 200여 명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난징에서는 당연히 보다 많이 제거해야 한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각 지역의 지도부에게 진압을 위한 구체적인 처형 계획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반혁명 진압의 결과, 중국 동부 지역에서는 1951년 11월~1952년 8월까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71,128명을 체포하고 이 중 10,727명을 처형하였다. 참고로 이는 마오쩌둥이 제시한 전체 인구의 0.1%를 훨씬 넘는 수치로 이 지역의 진압 실적은 ‘초과 완수’로 평가되었다. 특히 마오쩌둥이 직접 처형자의 수를 지시한 상하이에서는 1950년 초에 이르기까지 투옥된 사람의 수가 3만 명이었고, 1951년에는 총살된 사람만 1,800여 명에 달했으며, 공개적으로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1만여 명에 육박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반혁명 진압 조치로 본토에 남아 있던 국민당 잔당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건국 후 각지에서 빈발했던 무장폭동도 거의 사라졌다. 아울러 도시에서 공산당 정권을 위협하던 국민당 스파이에 의한 살인, 방화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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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항미원조’ 정치학습을 하는 중국인들(단둥 항미원조기념관, 2024년 8월 필자 촬영).
한국전쟁은 중공의 이데올로기를 중국인들의 생활 곳곳에 침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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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 정치학습을 하고 있는 중국 부녀자들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2024년 8월 필자 촬영)

 

‘항미원조’는 중국공산당에게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는 수준을 넘어 중국 사회의 제반 역량을 보완하고 강화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항미원조를 이용한 대표적 사례로 전쟁 이후 열악한 보건 상황과 중국인들의 낮은 위생 의식을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벌인 ‘애국위생운동’을 들 수 있다. 예방접종, 손씻기, 청소 등 각종 위생사업은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벌일 수 있는 ‘세균전’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실시되었으며, 이 대중운동에 앞장선 공산당 간부와 당의 지지자들은 타국을 상대로 고국을 지킨 ‘애국자’로 추앙되었다.

또한, 당원들은 ‘항미원조’를 구실로 도시와 촌락에서 조직적인 모금 활동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애국공약’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전쟁 지원 활동이 아니었다. 당원들은 각 가정을 방문하여 가족 구성원들의 사상과 행동을 파악하고, 그들이 공산당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자신들에 대해 공동체에서 어떤 소문이 도는지 파악하는 작업이었다. 이 방대한 사업은 당원 외에 지원자를 받아 실시하였는데 지원한 ‘애국자’ 중에서 예비 당원을 발탁하고 육성하여 당의 규모를 늘렸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이 끝나고 ‘항미원조’가 막을 내릴 무렵, 중국공산당은 중국 전역에서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도시라는 낯선 환경에 대한 사회적 통제력을 강화하고 장악했으며, 당의 규모를 집권당에 걸맞게 늘렸고 전후의 처참했던 사회질서를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한반도의 평화가 중요한 이유

한국전쟁은 중화인민공화국, 보다 정확히 그 집권 정당인 중국공산당에게 상당한 이득을 안겨준 사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득의 대부분은 대중운동인 ‘항미원조운동’에서 나왔다. 정권의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혼란스러운 대도시들을 정돈하고, 인민들의 의식을 개조하는 모든 일이 전쟁 상황에서는 ‘애국’으로 치장되었다. 위기에 처한 북한을 돕고 중국 본토로 침략해 올 가능성이 제기되던 미국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침략을 천신만고 끝에 격퇴한 지 5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을 쫓아낸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항미원조’의 설득력은 매우 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은 내정을 위해 ‘항미원조’를 충실하게 이용하고 있다. <장진호>와 같이 ‘항미원조’를 주제로 한 블록버스터 영화는 9~10월 국경절 기간마다 제작되어 관객몰이를 하고 있고,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은 평일에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미국과의 갈등이 점점 첨예해지는 상황에서 세간의 반미 감정을 조성하면서 미국에 맞서 인민들을 이끌고 중국을 지킬 존재는 중국공산당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에 ‘항미원조’만큼 어울리는 역사적 소재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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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에도 붐비는 단둥 항미원조기념관(2024년 8월 필자 촬영)



한국전쟁으로 이익을 얻은 것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공산당뿐만이 아니다. 일본도 한국전쟁을 기회로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일본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에 보급물자 생산 및 수송을 맡으면서 전후의 불황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 반면, 한국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오직 우리 민족뿐이다. 경제 기반은 붕괴되었고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겼으며, 민족 간 분열은 심화된 채 전쟁의 위기가 도사린 땅으로 전후 70년을 보내야 했다.

국제정치에서 우리가 흘리는 피는 누군가의 살이다. 주변 국가들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얼마든지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중국의 ‘항미원조’가 그 생생한 사례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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