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역사적 전모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사 최초의 국가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고조선에 대한 대중의 기대는 높다. 가장 오래되고(最初), 가장 크고(最大), 가장 강한(最高) 나라였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동북아시아 대륙을 재패한 제국이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 듯하다. 시중에 나와 있는 고조선 관련 책에 ‘첫’, ‘문명’, ‘대륙의 지배자’, ‘민족의 뿌리’ 등과 같은 단어가 제목으로 들어가 있는 예가 상당하다. 어떤 경우는 학술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판명된 『환단고기』 같은 책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소개한 것도 있다.
고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 『우리 문헌 속 고조선을 읽다』는 학계의 전문가들이 현존하는 사료 속 고조선 기록을 찾아 현재 쟁점이 되는 부분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학술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고조선에 대해 궁금해 하는 주제를 목차로 제시하고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대신 흥미 있는 주제를 먼저 들춰 읽어도 좋다.
『우리 문헌 속 고조선을 읽다』 표지
단군신화의 변형은 고조선을 이해하기 위한 전통시대 지식인들의 고뇌의 결과
많은 사료를 찾아서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행히 결과는 참으로 흥미로웠다. 사료마다 다르게 기록된 단군신화의 여러 변형은 건국에 대한 인식의 다채로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신화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지식인들의 고뇌가 담겨 있었다.
고려의 『삼국유사』는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마늘과 쑥을 먹고 여인이 된 곰 사이에서 단군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조선의 『용비어천가』는 단군이 직접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온 것으로 기록한다. 조선 후기인 1850년대에는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가 곧 단군이라 하여 고조선을 부여와 연결시킨다. 왜 이런 신화의 변형이 일어났을까?
이 책의 필자들은 단군신화의 여러 형태를 사료마다 들추어내 비교하면서 시대적 상황, 저자의 학맥과 저술목적 등을 종합, 분석하여 이러한 변형이 갖는 의미를 설명한다. 단군이 사람으로 변한 곰에게서 태어난 것보다는 하늘에서 직접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유학자적 입장에서 합리적인 해석으로 본다. 게다가 토템보다는 건국자를 하늘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이 권위를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한(漢)의 팽창을 위해 탄생한 기자조선,
외교적 수사로 기자를 소환한 고려와 조선
이 책에 실린 기자와 기자조선에 관한 내용도 우리의 인식을 전환시킨다. 한(漢)이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군현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기자조선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국내 학계의 통설이다. 한국고대사를 전공한 해외 학자들도 한이 강역을 팽창하는 과정에서 지역 연고와 명분을 위해 기자조선이 처음 만들어지고, 나중에는 수(隋)가 고구려를 조공책봉 질서에 배치하면서 이야기가 덧붙고 윤색됐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므로 이제 기자조선은 고조선사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기자조선은 조선시대까지도 유의미한 나라로 자리매김했을까? 조선의 유학자 가운데에도 기자조선이 실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조선은 계속해서 기록되고 회자되었다.
흥미롭게도, 기록되고 언급된 맥락을 찾아보니 대외관계, 외교의 측면이 새롭게 드러났다. 이성계가 명 홍무제로 하여금 국호로 ‘조선’을 선택하도록 유도한 까닭도 알고 보면 ‘조선’이라는 신흥 국가가 주변 ‘오랑캐’와는 차원이 다른 ‘유교의 나라’임을 강조하기 위한 외교적 측면이 강했다. 조선은 명과 공유할 수 있는 역사적 기억으로서 기자를 소환했다. 기자를 통해 외교적으로 유리한 고점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전의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요(遼)가 압록강 이남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하자 고려는 기자 이래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다고 하여 요와의 영토 분쟁에서 기자를 호출했다.
고려와 조선은 원·명·청이 구축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기자를 자국사에 포함시켜 외교적 수사로 활용했다. 이제 기자는 사대의 상징이 아니라 외교적 수사이자 실리를 위한 적극 외교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조선에 오는 명 사신마다 조선과 기자를 연결시키면서 기자 정(井)이나 기자묘 같은 사적을 찾고 참배했다. 이렇게 기자와 기자조선은 확대, 재생산되면서 급기야 유적까지 평양에 들어서게 된다.
오늘날 역사학자의 접근과 유사하게
고조선 강역에 과학적으로 접근한 조선의 엘리트들
한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군현의 위치 고증을 통해 고조선의 강역을 찾으려는 조선시대의 시도는 오늘날 역사학계의 접근과 사뭇 유사하다. 특히 17세기 『동사찬요』는 이맥(夷貊)의 침입을 받아 현도군 치소가 이동한 기록을 추가하여 현재 랴오닝성 푸순에 옛 현도성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푸순의 노동공원에 있는 고성이 제3현도군 치소로 인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사 연구자들에게 유의미한 자료를 제공한 셈이다.
고조선과 연(燕)의 경계인 만번한이나 고조선과 한의 경계인 패수에 관한 고찰도 눈길을 끈다. 『동사찬요』는 패수라 불리는 강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접근했고, 『동국통감제강』, 『열하일기』 등은 고조선의 도읍이 옮겨지면서 강 이름도 따라서 옮겨졌다고 주장했다. 『동사강목』, 『반계잡고』, 『아방강역고』 등과 같이 만번한을 『한서』 지리지에 보이는 번한(潘汗)과 연결시킨 접근도 있다. 이 문헌들은 패수를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 요하 등으로 고증했는데, 오늘날 역사학자들의 연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패수를 대동강이라 하는 사람은 우리 강토를 줄여서 말하는 것”이라고 한 박지원의 비판도 오늘과 닮았다.
‘전통시대 지식인들의 고조선 인식’을 읽으며 우리의 시각도 넓어지길
이 책은 문헌 기록을 교차 비교하면서 전통시대 지식인들이 고조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주제별로 살펴본 것이다. 이 책이 독자의 궁금증을 전부 해소해 주거나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 책이 고조선의 역사에 좀더 다면적이고 개방적인 시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독자를 안내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고 한들 또 어떤가? 크고 작은 나라들이 상호작용하면서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아예 맥이 끊겨 잊힌 나라도 많다. 이러한 끊임없는 인류의 발자취를 ‘역사’라고 하지 않던가. 전통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고조선’을 공유하고 있는 것만도 충분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에 오는 사신들이 기자 사적을 방문하길 원하자 조선은 기자묘, 정전(井田) 등을 적극적으로 평양에 유치한다.
(윤두수 편, 『평양지』 「평양관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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