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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STORY
영화와 드라마가 보여주는 독립운동의 꿈과 현실
  • 신효승 국제관계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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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 포스터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영화 <암살>에서 염석진(이정재 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김구의 신임을 받는 경무국 대장이다. 염석진은 1911년 손탁호텔에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의 암살을 시도하였고, 이후 탈출하여 다시 독립운동에 합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넷째 손가락이 잘렸다. 그는 광복 이후 밀정 혐의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회부된 재판에서 웃통을 벗어 대중에게 보이며 자신의 몸에는 “일본 놈들의 총알이 여섯 개나 박혀 있습니다”라고 울분을 토한다. 그리곤 염석진은 자신의 몸에 있는 상처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이야기한다.

사본 -염석진 재판

<암살>에서 염석진 재판 장면

 

“1911년 경성에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때 총 맞은 자립니다. 구멍이 두 개지요. 여긴 22년 상해 황포탄에서, 27년 하바롭스크에서, 32년 이즈모호 폭파사건 때 그리고 이 심장 옆은 33년에. 내가 동지 셋을 팔았다고 하셨는데, 그 친구들 제가 직접 뽑았습니다. 그 젊은 청춘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모릅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들을 보냈는지! 그건 죽음을 불사하는 항전의 걸음이었습니다.”

염석진의 퍼포먼스적인 선동과 눈에 보이는 너무나도 명확한 증거에 비해 반민특위 검사가 제시한 근거는 투서 등에 불과하였다. 누가 봐도 결과는 예측 가능하였다.

하지만 염석진은 이중간첩이었다. 염석진은 데라우치 암살 시도 이후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다가 동지를 배신하고 풀려났다. 이후 밀정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정보를 빼돌렸고, 발각될 위험에 처하자 조선에 돌아와 친일 경찰이 되었다. 결국 염석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암살작전대장 안옥윤(전지연 분)에게 사살당한다.

 

사본 -염석진 사살

<암살>에서 안옥윤이 염석진을 사살하는 장면

 

안옥윤은 염석진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왜 동지를 팔았나?”
자포자기한 듯 염석진은 답한다.
  “몰랐으니까.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이 대화는 광복 이전까지는 줄곧 일제 치하에서만 살아온 1911년생 안옥윤과 한말 일제의 국권 침탈과 망국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제 치하를 경험한 1885년생 염석진이기에 더욱 역설적이다. 서정주 시인은 1992년 『신동아』 4월호에 실린 「일정 말기와 나의 친일시」에서 “일본 지배가 오래갈 걸로 알고 자손지계(子孫之計)를 위해 일본에 순응해 살기로 작정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어찌보면 염석진은 불안과 체념에 놓인 일제강점기 세대를 극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꿈과 현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처음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세와 국내에서 거족적으로 전개된 3‧1만세운동으로 곧 독립이 이뤄진다고 예측하였다. 이러한 전망에 많은 이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곧 이런 예측이 실현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수많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을 위해 희생하려는 사람도 등장했지만, 그 이면에서 염석진 같은 변절자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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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하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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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상하이 황푸강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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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황푸강변

 

 

영화 속 상하이 풍경과 임시정부의 흔적

흔히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습은 중국 내 프랑스 조계라는 특수한 상황과 어우러져 주로 현재는 맞은편에 푸둥 지역 방송관제탑인 둥팡밍주(東方明珠)라고 불리는 화려한 건물이 보이고, 뒤편에는 수백 년 된 건물이 늘어선 황푸강변 안쪽의 어느 한 장소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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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정>의 포스터

 

1923년 ‘황옥 경부(黃鈺 警部) 폭탄사건’을 모티브로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영화 <밀정>(2016년 작)에서도 도자기 등을 생산하는 곳은 중국의 시골 모습이지만, 주인공 등이 주로 활동하는 곳은 상하이의 어느 뒷골목이다. 이 영화에서 임시정부 청사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연계순(한지민 분)이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기 위해 상하이 역사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상하이의 어느 번화가를 따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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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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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프랑스 조계지 지도 위에 현재 지도를 추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치를 비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처음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자리를 잡았는데, 활동이 그리 녹록한 곳은 아니었다. 또 임시정부 활동이 처음에는 외교에 집중되었지만, 외교 활동만으로 일제를 몰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구국모험단’과 같이 무장투쟁이 병행될 수밖에 없었는데, 1920년 4월에는 폭탄을 제조하던 중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역지사지로 만약 외국인들이 부산 등 우리나라 도시에 독립운동을 위해 터를 잡는다면 설사 그 뜻에는 동참한다 해도 그들의 활동 허용 범위는 우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는 선이 될 것이 분명하다. 즉, 폭탄을 제조하다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한다면 이를 용납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국외 독립운동의 경우 그 국가 또는 지역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변장한 독립운동가들: 생존을 위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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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복장을 한 독립운동가 모습


국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그 지역 사회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변장운동’을 일찍부터 전개하였다. 특히 만주 지역 등에서는 중국인의 억압과 배척이 심해지자 중국인처럼 머리를 자르고 옷을 입어 ‘변장’하여 압제를 피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25년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 마티알 앙리 멀린(Martial Henri Merlin)에 대한 암살 시도가 발생하면서 프랑스는 일본 내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을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일본은 상하이 한인 등의 정보를 요구하였고, 그 결과 프랑스 상하이 조계 당국은 월간 보고서를 작성하여 일본에 전달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프랑스와 일본의 거래에 따라 임시정부 활동 등이 담겨 있었다.

특히 1927년 프랑스 상하이 조계 당국이 중국인 비밀조직인 청방에게 지역 내 치안을 맡기면서 한인의 활동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 과정에서 상하이 조계 임시정부 요인들 역시 변장이 일상화되었다. 조계 밖의 상황은 더욱 어려웠다. 만주 지역에 있는 조선인들은 중국 지방정부의 추방정책과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고자 중국 귀화를 선택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

그럼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국외 독립운동이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현지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32년 상하이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프랑스 조계를 떠나 중국 지역 사회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중국인의 도움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갈 수 있었고, 결국 난징에 자리잡으면서 광복군을 창설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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