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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ISSUE
3.1운동과 여성: 광장에서 독립과 평등을 외치다
  • 박정애 한일연구소 연구위원
사람은 동등하다는 자각
 
여성은 사적 영역, 남성은 공적 영역에 속한다는 오래된 성별 역할 규범은 여성을 정치적 범주에서 배제해 왔다. 공식적인 정치사회 시스템에서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여성은 어머니나 배우자의 이름을 통해서만 정치권력의 주변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역사 속 여성의 정치는 아들이나 남편, 혹은 친정이나 측근 남성을 경유해 해석되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의 정치 행위를 정치적 주체로 평가하지 못한다면, 여성의 정치가 아무리 좋은 성과를 내어도 정당한 평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때문에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의 정치에는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가 뒤따랐다. 그리고 사적 영역의 존재로 규정된 여성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정치 영역에 부적절한 본성을 가졌다는 부당한 인식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확장과 더불어 시작된 동학과 서학이 확산되면서 한반도에도 여성에 대한 인권의식이 생겨났다. 천부인권설과 민주주의의 확대, 그리고 자본주의 산업화에 따른 여성 노동의 수요 증대 속에서 여성 억압이 불합리하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에 따라 ‘여성의 근대화’가 요구되었고, 공적 공간에서 여성들이 단체를 결성하여 ‘배울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1898년 찬양회 운동). 일본의 식민지화를 겪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성장한 한국 여성운동은 구국운동 차원으로 시작되었다는 특징을 보였다. 또한 본격적인 민족운동, 계급운동 이전에 교육계몽운동에 주력해야 했는데, 이는 당시 조선 여성들의 처지 때문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교육제도와 가부장적 배경 속에서 근대교육의 기회에서 가장 밀려나 있었으며, 성적, 민족적, 계급적 모순이 중층적으로 얽힌 사회적 조건에 놓여 있었다.
 

3.1운동을 거치며 가장 열렬하게 급진한 것은 여성들!
 
1919년 3.1운동을 최초의 여성 정치운동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적이고 비정치적 존재로 인식되던 ‘여성’이라는 범주를 공적이고 정치적인 범주로 처음 각인시킨 사건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3.1운동 당시 거리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여학생들
3.1운동 당시 거리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여학생들(출처: 국가기록원)
 

세계의 풍조를 따라 조선에도 남녀 식자 계급에서 은닉한 선비와 궁촌의 민까지 평화, 인도, 정의, 자유를 절규함은 작년 3월 1일을 기념할 과거의 일대 사실이어니와 작년 이후로 조선에는 물질상, 정신상에 급진적 각성이 습래하여 … 곳곳에 집회, 강연, 설교 등이 있어 시대의 변천되는 신생활을 장려하는 현상이외다. 그중에도 가장 열렬하게 급진한 것은 부인계이다. 조선 부인은 타락한 기생충에서 겨우 자기도 ‘사람’이라는 자존심을 가질 만큼 각성하였고, 남자와 아이의 중간에 두고 두 번째 사람이 아닌 것을 자각하는 동시에 일면으로 가장 가까운 자기 내적 생활로 시작하여 사회에 대하여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계된 직무와 권리를 찾는 것 같나이다.
 「대구에 갔던 일을 김마리아 형에게 제3신(3)」, 『동아일보』, 1920. 6. 21.
 
 
3.1운동 발발 1년 후, 나혜석이 대구감옥에 수감된 김마리아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나혜석은 3.1운동 이후 모든 것이 변한 가운데 “가장 열렬하게 급진한 것은 부인계”이며, 조선 여성은 “타락한 기생충”에서 “사람이라는 자존심을 가질 만큼 각성”하였고, 남자와 아이 사이의 “두 번째 사람이 아닌 것을 자각”했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자기 내적 생활로 시작하여 사회에 대하여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계된 직무와 권리를 찾는” 것이었다고 했다. 이는 조선 여성들에게 3.1운동이 어떤 경험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말이다. 곧 자기 내적 생활의 자각, 여성이 ‘동등한 사람’이라는 각성을 공유하는 계기였으며, 이는 바로 사회와 관계된 직무와 권리를 찾는 것, 다양한 방식의 사회 참여를 의무이자 권리로 인식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3.1운동 직전인 1919년 1월 초 일본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이 결성되었을 때 여성 유학생들은 가입하지 못했으며, 2·8독립선언서에도 연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4월 11일에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는 남녀 귀천 및 빈부 계급 없이 일체 평등할 것과 모든 공민 자격이 있는 자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3.1운동 이후, 겹쳐진 해방을 품은 여성운동
 
3.1운동 이후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여성, 특히 여성 조직을 만들어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여성의 활동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이들에게 독립운동이나 민족주의운동, 사회주의운동 참여는 두 가지 해방을 의미했다. 정치‧사회적 변혁의 끝에는 여성 인권과 여남 평등이 동반된다는 믿음이었다. 3.1운동 이후 김마리아는 대한애국부인회의 취지서를 작성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였다.
 
아! 우리 부인들도 국민 중의 한 분자이다. 인권을 찾고 국권을 회복할 최대의 목표를 향하여 우리에게는 다만 전진이 있을 뿐이요, 추호의 후퇴를 용납할 수 없다. 이때 오로지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 부인들은 모두 다 일어나서 용기를 분발하고 이상을 높이고 지기(志氣)를 상통함으로써 공고한 단결을 도모하고자 본 부인회를 조직하는 것이니, 국민성을 각오하여 일제히 찬동하여 주기를 천만 희망하는 바이다.
최은희, 1969, 「여권에서 애국으로: 여성운동」, 『한국현대사』 4, 신구문화사
 
동아일보19200609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운동자금을 모금하다 검거된 대한애국부인회의 공판 기사(『동아일보』, 1920. 6. 9.). 
위는 김마리아, 아래는 황에스더의 모습이다.
 

3.1운동 이후 여러 지역에서 비밀 애국부인회가 조직된 배경에는 ‘국민의 일원으로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의무’가 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로 인해 남성도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성뿐 아니라 여성 또한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동등하게 권리를 갖는 민주공화제를 구성할 수 있다는 인식이 엿보인다. 국권 회복과 함께 조선의 여성과 남성 모두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다고 전망한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여성운동론에서 여성의 ‘진정한 해방’은 ‘무산계급 해방과 같이 되는 것’이었다. 가부장제와 사유재산제가 공유한 억압적 구조를 기반으로 계급 해방과 여성 해방을 함께 주장한 이들 논의는 사회주의 여성해방사상의 고갱이를 이루었다. 박원희는 다음과 같이 ‘민중의 민족적 경향’을 언급하며 ‘외국의 침략주의와 적극적 투쟁’과 ‘무산계급 해방운동’과 ‘부인의 해방’을 함께 주장했다.
 
민중의 민족적 경향에 의하여 외국의 침략주의와 적극적으로 투쟁하여 무산계급 해방운동에 조화시키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 부인의 진정한 해방은 무산계급 해방과 같이 되는 것을 각오하지 아니치 못하게 된다. 가정 속에서, 공장 속에서 신음하는 여동무들은 주저하지 말고 자체의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무산계급 전선에 가담하라. 굳게 단결하며 일방으로는 민족적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자.
박원희, 「우리들의 진로: 승리는 단결에 있다」, 『조선일보』, 1927. 1. 6.
 

‘여성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여성 해방’이라는 말은 이 시기 활동가들에게 국권 회복이었고, 무산계급 해방이었으며, 식민지 해방이었다. 각각의 목표는 서로 겹쳐 있었으며, 앞뒤 순서도 없었다. 정치나 경제 구조 변혁에 참여하여 권위적인 권력을 혁파하고 피식민지민이나 노동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의무를 동등하게 함으로써, 인권을 찾고 나아가 인간이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1927년 결성된 근우회는 그 선언서에서 “여성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근우창간호표지
‘근우회 선언’이 실린 『근우』 창간호(192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