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연구와 고구려성
연구에 이용할 수 있는 사료가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삼국사기』 등 사서들이 있지만, 이들은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의 편찬물이며 그마저도 부족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문헌 자료만으로 살필 수 있는 그 시대의 실상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고구려인들이 축조한 성곽은 부족한 문헌 사료의 틈을 메워줄 또 하나의 역사 기록이라 할만하다.
현재까지 고구려 성곽으로 알려진 곳은 200여 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170곳 정도가 중국의 동북 3성, 예전에 ‘만주’라고 부르는 지역 곳곳에 남아 있다. 이들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 고구려의 성곽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재단은 중국 현지의 조사 내용을 정리하여 성곽별로 그 특징과 현황을 기술한『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과 유물』시리즈를 오랜 기간의 작업을 거쳐 발간하기도 하였다.
재발간의 이유
그러나 고구려 성곽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우선 중국 현지의 조사는 아직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수준에 있지 못해, 조사에서 누락되거나 현황 파악이 부족한 부분이 적지 않다. 발굴조사가 진행된 성곽도 몇몇 곳에 불과하다. 환인·집안의 고구려 도성이나 중원 왕조와 대결했던 요동 지역 일부 성곽이 조사되었을 뿐 그 외 대다수 성곽에 대해서는 여전히 현지의 전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사 자료의 한계에 더하여 현지 조사의 여건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은 향후 관련 연구의 진전을 제약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도 현지의 산과 들을 다녀야 하는 조사 작업에 제약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날이 갈수록 외국인 연구자의 유적 답사가 어려워지고 있다. 앞으로 연구를 담당하게 될 세대가 실제 성곽을 살필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더 없어지고 있다.
재단이 『고구려성 사진자료집』을 다시 발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상황 판단에서다. 촬영 시점의 형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진은 또 하나의 기록물이라고 생각한다. 『高句麗城 사진자료집: 중국 遼寜省, 吉林省 西部』와 『高句麗城 사진자료집: 중국 吉林省 東部』는 2004~2010년의 시기에 고구려의 주요 무대였던 요령성과 길림성 지역 곳곳에 남아 있던 성곽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두 지역 전역을 작업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연작이 가진 자료적 가치는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그때의 모습에 큰 변화가 없이 남아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훼손과 변형이 가해져 작업 당시에 보았던 형상이 사라지고 만 곳도 여럿이다. 어떤 성은 정비 과정을 거쳐 제법 번듯한 성벽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정비되기 전의 상황을 살폈던 필자의 눈에는 원형이 과연 저런 모습이었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게다가 지역 개발과 관광지화로 인해 이런 추세는 더해질 것이다. 무너진 채였지만 잘 남아 있던 원형의 흔적들을 이 사진자료집에서 찾아보기 바라는 마음이다.
사진자료집의 구성과 내용
이 두 권에는 고르게 쌓은 석벽이 길게 뻗어나간 장대한 모습을 담은 사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보다는 우거진 숲속에서 보이는 두터운 흙벽이나 성기게 쌓은 석벽의 모습이 더 많이 담겨있다. 뛰어난 축성술로 이미지화된 고구려의 성벽을 연상한 독자들에게는 꽤나 낯설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구려 성곽에는 장대한 석벽으로 이루어진 성곽이 아닌 흙과 돌을 적절히 쌓아올린 토석혼축이나 아예 토벽인 성곽도 적지 않다. 그리고 고구려성이라 하면 산성을 떠올리지만 평지에 쌓은 성곽도 여러 곳에서 찾아진다. 허물어지거나 흔적만 남은 성곽의 모습이야말로 당시 모습을 보여주는 실물자료가 된다.
백암성(『고구려성: 중국 요령성, 길림성 서부』)
이 연작의 한 권은 요령성과 길림성 서부 지역에 남아 있는 성곽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환인에서 건국한 고구려는 집안으로 도성을 옮기며 급성장하였고, 이 과정에서 혼하·소자하 연안을 거슬러 올라가며 중원 왕조의 세력을 축출하였다. 또한 요동반도 일대에서는 수·당군과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고구려 역사의 주요 현장들이 이 책에 수록된 44곳의 성곽이다. 천 년의 시간 속에도 여전히 견고한 모습을 남기고 있는 석축의 성벽선들을 이 책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두터운 성벽을 두른 산성이 있음에도 인근에 다시 산성을 쌓았던 특이한 현상을 득리사산성과 남마권자산성 사진에서 직관해 보기 바란다.
득리사산성(『고구려성: 중국 요령성, 길림성 서부』)
연작의 또 다른 한 권은 길림성 동부 지역의 고구려성으로 필자가 판단한 스물다섯 곳을 중심으로 전작에서 다루지 못한 추가 자료와 상경성 등 몇 곳의 발해 성곽을 담고 있다. 옥저의 땅을 차지한 고구려는 책성을 쌓아 이 지역을 경영해 나갔으며, 고구려 멸망 뒤에는 그 유민들이 이곳에 발해를 세웠다. 그럼에도 현지에 남아 있는 대다수 성곽은 발해나 요·금시대의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살기성 등 극히 일부의 성곽만이 고구려인이 쌓은 성곽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두만강변의 고성리고성은 우리가 임진강변에 가서 볼 수 있는 호로고루나 은대리성과 같은 강안 평지성에 해당한다. 후자가 고구려인이 축조한 성곽이라는 점에서 고성리고성의 초축 시기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조동산성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 최북단의 고구려성인 운두산성과 짝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같은 계열의 성곽으로 파악하였다. 이 판단은 사진집 발간 뒤, 두 성곽의 축조 방식이 동일하다는 사실로 뒷받침되었다.
성곽 사진의 자료적 가치
이 두 권의 사진자료집을 보면서 글로 표현된 형상이나 현황이 실제와 얼마나 다른가를 알아보길 바란다. 살기성은 둘레 길이가 7km에 이르는 대형 산성으로 그 규모에서 책성의 후보지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 성의 내부 전경을 담은 몇 컷의 사진은 거주공간이 매우 협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이곳이 책성일 수가 없는 증거가 된다. 또한 석축의 성곽이라 해도 축성방법과 성돌의 가공방식에서 길림성 동부지역의 석축 성곽은 요동반도나 환인·집안 지역의 석성에 비해 수준이 뒤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들은 성곽의 주요 시설과 축조상태를 볼 수 있는 장면으로 구성하였다. 아울러 주변 자연환경을 살필 수 있는 사진을 수록하여 입지조건을 함께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 성곽의 현황을 기술하면서 관련 역사적 사실도 서술하여 그 성곽이 지닌 역사적 의미도 되새기도록 하였다.
요령성, 길림성 서부 편 개정판에는 전작에서 포함하지 못했던 장하 후성산산성이 추가되었으며, 고구려성에 대한 새로운 연구 내용을 몇 군데 성곽 해설에 반영하였다. 또한 개모성 등 몇 곳에는 사진을 교체하거나 다른 사진을 추가했다. 길림성 동부 편 개정판은 판형만 변화를 주고 체재는 바꾸지 않았다. 여기에 부록으로 수록된 요동반도 성곽과 집안 지역 유적 사진들은 길림성 동부지역에 남아 있는 성곽들과의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대로 두었다. 발해의 성곽을 부록으로 구성한 편제도 바꾸지 않았다. 발해인들이 쌓은 성곽이 분명한 몇 곳을 제외하면, 연변 지역의 대다수 성곽은 고구려 때 쌓은 것이며 발해인들이 이어서 사용했을 것이라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간단한 위치정보와 지도로 현장을 찾고 수풀 속에서 유구를 확인했던 필자의 발자취를 따라 고구려성의 흥미로운 세계로 들어가 보길 권한다. 문헌에서는 살필 수 없는 생생한 현장 정보를 얻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