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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의 재발견
한일 우호의 길: 태정관지령, 아베의 야욕, 이와쿠라의 용기
  • 김영수 독도연구소장
최고국가기관의 선언: 태정관지령 제223호
 
일본 메이지정부의 심장부가 생산한 문서 위에 그들이 직접 찍은 도장은 150년 전 그들이 확정한 ‘진실의 자백서’였다. 1877년 3월 일본 최고국가기관으로 조선의 의정부와 유사한 위상을 지녔던 태정관(太政官)은 내무성의 보고에 기초하여 울릉도(竹島)와 독도(松島)를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판단했다. 
 
당시 일본 내무성은 메이지유신 이래 근대적 지적 편찬 작업을 추진 중이었고, 그 일환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관할 문제가 불거졌다. 1876년 10월 5일 일본 내무성 지리국 지리대속 스기야마 에이조(杉山榮藏)는 시마네현 지적편제계(地籍編製係)에게 죽도(울릉도)에 대한 기록이나 고지도를 조사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그달 16일 시마네현령 대리 참사 사카이 지로(境二郞)는 울릉도와 독도의 지적 편찬에 관한 질의서를 내부경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에게 보냈다. 이 질의서에는 ‘유래의 대략(原由之大畧)’과 ‘기죽도약도(磯竹島略圖)’가 첨부되었다. 기죽도는 울릉도를 의미한다. 
 
이듬해인 1877년 3월 17일 내무경 대리 내무소보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는 내부적으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 다음 태정관 우대신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에게 질의했다. 태정관은 그달 29일 지령문을 확정하여 내무성을 통해 시마네현에 보낸 다음, ‘죽도 외 일도를 일본 영토 외로 정함’이라는 제목을 붙여 편찬문서인 「태정류전」에 기록했다. 태정관지령은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입증해 주는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일본 내무성은 시마네현의 답변서를 받은 다음 5개월 동안 당시의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외교문서를 면밀히 조사하고 상신한 것이다. 그 후 태정관은 1877년 3월 20일 ‘입안 제20호(立案第二十號)’를 기안했는데, 태정관 본국(本局) 내부 접수번호가 240호이다. 태정관 권대서기관(権大書記官) 무타구치 미치테루(牟田口通照)는 일주일 동안 내부 검토를 마치고 3월 27일 최종 상신했다. 1877년 3월 29일 최종 승인된 태정관지령 제223호 문서에는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참의 대장경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참의 외무경 데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 참의 사법경 오키 다카토(大木喬任), 태정관 본국 대서기관장(大書記官長) 겸 내무대보 히지카타 히사모토(土方久元)와 대서기관 이와야 이치로쿠(巖谷一六) 순으로 도장이 찍혀 있다. 당대 일본을 이끌던 거물들이 차례로 찍어 내려간 이 붉은 인장들은 훗날 그 어떤 억지로도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최종 판결문이다.
 
태정관지령
태정관지령
 
1877329公文録기죽도약도
기죽도약도
 

일방적 울릉도·독도 ‘문제’의 설계: 시마네현령과 아베 가문의 영토 야욕
 
1877년 시마네현의 현령으로서 실권을 쥐고 있었던 인물은 사토 노부히로(佐藤信寛)이고 참사는 사카이 지로(境二郞)였다. 
 
현대 일본 보수정치의 상징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국가관과 그 사상적 연원은 그의 어머니 아베 요코(安倍洋子)의 고조할아버지인 사토 노부히로로부터 시작된다. 사토 노부히로는 1816년 1월 25일 조슈번 무사 사토 겐에몬(佐藤源右衛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32년부터 1840년까지 번교 명륜관(에 들어가 유학자 야마가타 타이카(山県太華)에게 사서삼경 등 유교 경전과 통치학을 배웠다. 1841년부터 1843년까지 에도로 올라가 시미즈 세키조(清水赤城)의 문하에서 나가누마(長沼)류 병학(兵學)을 사사했다. 이때 그는 실전적인 전술과 해안 방어 전략에 눈을 떴다. 
 
1852년 사토 노부히로는 『병요록(兵要錄)』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에게 직접 전수하며 그의 스승이자 조력자로 활동했다. 요시다가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 출현 이후 해방(海防) 정책을 강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군사 이론적 배경에는 사토 노부히로로부터 배운 지식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1862년부터 1864년까지 사토는 조슈번의 해안 방어를 총괄하는 해방수당방(海防手當方)을 맡았다. 이는 요시다 쇼인과의 교류를 통해 정립한 ‘해방론’을 실제 정책으로 옮기는 과정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1871년 하마다현(浜田県) 권지사(権知事)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으며, 1874년 하마다현령으로 승진한 데 이어 1876년 4월 하마다현이 시마네현에 통합됨에 따라 시마네현령으로 임명되었다. 특히 1876년 10월 하순 ‘하기의 난(萩の乱)’ 당시에는 반란군이 시마네현 하마다로 도주하자 이들을 신속히 추격하여 11월 5일 직접 체포했다. 1877년 2월 세이난전쟁 시기에는 시마네현령으로서 관할 지역 내 전직 무사들의 동요를 막아 치안을 안정시켰다. 1878년 1월 관직을 물러난 후 원로원 의관 등을 거쳐 1900년 2월 사망했다. 
 
사토 노부히로는 일본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의 증조할아버지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본 전 총리 아베 신조의 어머니인 아베 요코의 고조할아버지였다. 요시다 쇼인에게 해방론을 가르치며 그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해 주었던 사토 노부히로, 그가 심은 팽창주의의 씨앗은 5대손인 아베 신조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시마네현 참사 사카이 지로는 1836년 8월 나가토국 하기 쓰치하라촌에서 조슈번 무사 사이토 사다요리(斎藤貞順)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50년 번교 명륜관에서 요시다 쇼인에게 배웠다. 1856년 쇼카손주쿠에 입문하여 수학한 뒤, 메이지유신 이후 1872년 10월 시가현 참사를 거쳐 1874년 1월 시마네현 참사로 부임했다. 특히 1876년 현령 사토 노부히로가 ‘하기의 난’ 진압을 위해 현청을 비운 10월 중순 현령 대리로서 실무를 총괄하며 10월 16일 내무성에 울릉도와 독도의 지적 편성 여부를 묻는 「죽도 외 일도 지적 편찬 방법에 관한 질의」를 발송했다. 이후 1878년 1월 시마네현 권령, 그해 5월 시마네현령으로 승진하여 도로 정비와 현회(縣會) 개설에 진력한 뒤, 퇴임 후인 1890년부터 쇼카손주쿠 보존 활동을 주도했다.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려 했던 시마네현의 움직임은 우발적인 행정 절차가 아니었다. 그 정점에는 ‘정한론(征韓論)의 심장’이라 불리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적 맥락이 닿아 있었다. 당시 시마네현의 현령 사토 노부히로와 참사 사카이 지로는 이 각본을 실행에 옮긴 핵심 인물이었다. 사토가 영토 편입의 명분과 전략을 구상한 ‘머리’였다면, 사카이는 이를 행정 현장에서 구체화한 ‘몸통’이었다. 사카이 지로가 실무 행정을 주도하며 영토 편입의 발판을 마련하는 동안, 현령 사토는 1877년 3월 태정관지령이 내려지기 전후 울릉도와 독도 편입 시도를 총체적으로 지휘했다. 결국 이들의 치밀한 협업은 요시다 쇼인으로 연결된 정한론적 팽창주의가 지방행정조직을 통해 구체적인 실천으로 드러난 결과였다.
 

한일 우호의 용기: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의 공존 결단
 
이와쿠라 도모미는 우리에게 1871년 ‘이와쿠라사절단’을 이끌고 서구 근대문물을 시찰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77년 3월 29일 우대신의 신분으로 태정관지령 제223호를 통해 ‘문의한 죽도(울릉도) 외 일도(독도)의 건은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점을 명심할 것(伺之趣竹島外一島之儀本邦關係無之儀ト可相心得事)”이라는 최종 결정을 내리며 한국과 일본 역사의 이정표를 세웠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질 당시, 태정관의 수뇌부는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 태정대신과 타루히토 친왕(熾仁親王) 좌대신 체제였다. 그러나 1877년 2월 세이난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부의 기능은 분산되었다. 덴노와 태정대신과 내무경은 교토에 대본영을 설치하여 머물렀고, 좌대신 다루히토 친왕은 정토총독에 임명되어 사쓰마군 진압을 위해 전장에 있었다. 이처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와쿠라 도모미는 도쿄 태정관을 지키며 정부의 행정과 군사 보급 실무 전반을 책임졌고, 그 막중한 실권 속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님을 확정하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1825년 9월 교토에서 공경인 호리리카와 야스친(堀河康親)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38년 10월 공경 가문인 이와쿠라 도모야스(岩倉具慶)의 양자로 입양되어 이와쿠라 도모미로 개명한 뒤, 1840년대 초반부터 공가(公家) 자제들의 교육기관인 학습소에서 유학과 조정의 의례를 수학했다. 
 
1854년 1월 고메이(孝明) 덴노의 시종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조정의 정무를 익혔다.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8년 1월 해륙군사무총독 및 회계사무총독이라는 핵심 보직을 맡은 데 이어 6월 행정부의 수장 격인 행정관 보상에 취임하여 사실상 정부를 이끌었다. 이듬해인 1869년 7월 대납언으로 임명되어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를 보좌하며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1871년 7월 외무경에 임명되어 그해 12월 23일까지 수행했고, 그해 10월 태정관의 최고위직 중 하나인 우대신에 취임했다. 같은 해 11월 7일 이와쿠라사절단의 특명전권대사로서 구미 시찰을 떠나 미일수호통상조약 등 불평등조약 개정을 타진했다. 사절단에는 참의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대장경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공부대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부사로 동반했다. 사절단은 1년 10개월에 걸쳐 구미 각국을 순방하며 각국 원수를 면담하고 국서를 전달했으나, 조약 개정의 실마리는 찾지 못하고 각국으로의 ‘유학’이 주요 목적이 되었다. 
 
Iwakuramission岩倉使節の面。左から木孝允、山口芳、岩倉、伊藤博文、大久保利通 위키피디아 일어판
샌프란시스코 도착 직후의 이와쿠라사절단(1872.12.)
가운데 앉은 인물 이와쿠라 도모미 (wikipedia)
 

1873년 귀국 후 정한론을 반대하며 내치 우선의 원칙을 확립하였으며, 이후 1874년 2월 1일 태정대신 대리를 겸하며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세력의 하야로 인한 정국 혼란을 수습했다. 1883년 7월 59세의 나이에 우대신의 신분으로 사망하여 일본 최초의 국장이 치러진 뒤 사후 태정대신으로 추증되었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이면서 이후 무력에 기반한 정한론을 배격하고 국가의 내실을 우선시했던 현실적인 정략가였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영토관이다. 그는 당시 시마네현의 현령이나 참사의 협소한 시각과는 궤적을 달리했다. 이와쿠라는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고 명확히 선언함으로써, 불필요한 갈등보다는 한일 양국의 공존과 우호를 선택한 인물이었다.
 
17세기 안용복으로 상징되는 울릉도 논쟁부터 21세기 현재 일본의 일방적인 독도 영유권 주장까지 역사의 궤적을 톺아보면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은 단 하나다. 진정한 우호는 상대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하는 정직한 성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영토의 진실을 직시하며 평화적 공존을 택했던 이와쿠라 도모미의 용기를 재조명해야 한다. 이제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리는 아베 가문의 배타적 내셔널리즘이 아닌 역사 앞에 겸허했던 이와쿠라 가문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한일 관계의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