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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동아시아 역사에서 안중근이 남긴 족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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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Gilbert

 

''새로운 세계가 우리의 눈 앞에서 깨어나고 있다. 무력으로 점철된 구세계는 가고 의로움과 진실
이 지배하는 신세계가 온 것이다.''

 

세계평화에 대한 우드로 윌슨의 선견지명은 1919년 당시에도 독창적인 사상이었지만, 일각에서는 만약 윌슨이 안중근의 미완성 저작 <동양평화론>을 접했더라면 그러한 사상의 정립이 더욱 일찍 이루어졌으리라고 주장한다. 또한 1907년 헤이그 회의 당시 회원국들이 고종황제의 특사를 받아들였더라면 안중근에게는 최초의 대륙 내 연합을 구상한 자신의 저작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시간과 기회가 있었으리라고 추측해볼 만도 하다. 무엇보다도 민족주의자 였던 안중근은 전세계가 주목할 만한 행동을 감행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1909년 10월 25일 러시아 관할 하에 있는 기차역에서 일본의 대표적 정치가(Premier Statesman)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는 것으로 그의 이 같은 노력은 정점에 달했다. 이 같은 행동 이후 테러리스트이자 인도주의자였고, 민족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였으며, 유교주의자이자 기독교 신자였고, 암살범이자 영웅 이었던 안중근은 아시아 역사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으며, 여기에는 연구 부족 이 부분적인 이유로 작용한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안중근의 위치가 언제나 애매모호했던 이유는 분열을 막고 개혁을 이루고자 악전고투하던 동아시아 지역을 새롭게 변화시키려 노력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중근을 널리 알린 사건인 이토 히로부미 암살 100주기가 다가오는 이 시점에 어쩌면 우리는 안중근을 재평가하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상적 갈등을 넘어 오늘날의 세계에도 적절성을 가지는 역사적 위치를 부여해야 할 지도 모른다. 다섯 발자국 앞에 선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을 향해 총을 발사하던 순간, 안중근은 자신의 의거를 통해 조국 조선의 독립을 앞당기는 사건들이 촉발되기를 희망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토 히로부미 암살로 분노에 찬 일본정부는 오히려 한반도 강점을 서둘러 추진했지만, 안중근은 여전히 한국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인물로 칭송 받는다. 안중근의 극적인 암살 성공은 일본에 대한 저항을 촉발했으며, 이는 10년 후 일본의 조선 강점 위협에 맞서 2백만여 명이 시위에 나선 독립운동으로 성장했다. 조선의 입장에서 이 같은 사건은 모두 힘을 잃고 분열 된 상태로 근대세계의 침략을 애써 체념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던 조선에 강력한 힘과 통합의 메시지를 전했던 안중근의 숭고한 희생 덕분이었다. 안중근의 의거는 한국의 직접적 해방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기보다는 동아시아 전역으로 파급효과와 여파를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안중근을 단순히 순교자로만 바라보는 단순한 역사 해석이다. 안중근의 업적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살펴보려면 안중근이 한일 화해에 미친 영향, 평화운동가로서의 역할, 그리고 아시아 평화에 대한 그의 비전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아시아 최초의 의회제 정부에서 초대 총리를 지낸 인물 인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대한 일본의 초기 반응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 내 주요 도시에 휘몰아쳤던 분노와 반동의 물결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데이비드 킨(David Keene)의 발언을 인용한 아래 내용은 최근 안중근을 재평가하는 일본학자가 늘어나고 있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이 같은 참신한 견해는 저우언라이로 인해 널리 퍼진 반일감정설을 부정하고, 그 대신 보다 인도주의적인 범아시아적 접근법을 지지한다. 이 같은 범아시아적 접근법은 ASEAN, 1967년 이후의 동아시아 평화, 그리고 ‘공동의 이해’를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의 공동운명’ 의 현대적 의미를 예견하고 이를 안중근의 노력과 연결시킨다.

안중근은 반일주의자가 아니었다. 안중근이 가장 경애했던 인물은 의심할 바 없이 메이지 천황이었고,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안중근이 남겼던 가장 맹렬한 비난 중 하나는 조선의 복속이 아닌 동아시아의 평화를 원했던 천황을 의도적으로 기만했다는 것이었다.

킨의 발언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할 당시 안중근은 분리주의적 목적으로 의거를 결행한 것이 아니라 서로 반목하는 3국을 통합하기를 원했다는 유력한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안중근은 ‘아시아 평화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스스로를 간주했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공격이 점차 증가하는’ 시점에 일본이 ‘같은 황인종 국가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이유 를 이해하지 못했던 안중근은 일본의 범아시아 통합론과 관련해 이토 히로부미가 천황의 뜻을 거슬러 독단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경제, 재정, 군사통합을 주창한 안중근의 사상은 오늘날 UN과 ASEAN, 그리고 지난 40년간 지속된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내다본 선구적인 사상이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그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로는 결코 불가능했을 방식으로 안중근을 선구자 의 반열에 올려두었다.

안중근의 독특한 상황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들 중에는 안중근이 수감되었던 감옥의 간수들과 법정에서 그를 기소했던 검사들도 있었다. 안중근의 독실한 신앙, 모범적인 행동, 너그러운 인품, 뛰어난 서예솜씨, 그리고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완성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일본인들 사이에 안중근을 아끼는 마음이 싹트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안중근의 복리를 담당하던 간수 치바는 안중근이 처형된 후 간수 자리에서 사직했으며, ‘우리에게 서예가 없었더라면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그 같은 화해도 없었으리라’는 안중근의 서예작품을 평생 보물로 간직했다. 안중근의 서예와 글쓰기는 동아시아 평화를 향해 제국주의의 호전성에 맞서는 지적인 투쟁이 되었으며, 이는 전통적인 해석보다 중요한 시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코리아 타임즈(Korea Times)>에 게재된 본 에세이에 대한 언급 을 보편화하여 아시아 및 세계 역사에서 안중근이 가지는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비록 수십 년 이르기는 했지만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새로운 시대’의 잠재성을 완전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인 안중근을 평가함에 있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이제 배경으로 물러날 때가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의의를 꼽자면 이 사건이 없었다면 현대적 가치관을 가진 이상주의자 안중근이 오늘날까지 기억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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