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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안중근 현 시대를 내다본 선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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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ffrey Fattig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역 승강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해 불명예를 얻은 뒤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이 동아시아 현대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를 재조명해 보기에 적절한 때인 것 같다. 한국 국민들에게 그는 비극적이고 부당한 식민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투사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반면 일본 국민들로부터는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다진 초대 내각 총리대신을 저격한 암살범으로 오랫동안 지탄 받아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점은 모두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다각적·심층적으로 보지 못하고 너무도 단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제서야 깨닫게 되는 일이지만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우리가 안중근 하면 떠올리는 하얼빈역에서의 의거가 아니라 1910년 사형 직전에 쓴 미완의 저서 ‘동양평화론’에 나타난 그의 사상이다. 안중근은 아시아의 주권·독립 국가들이 단결하여 지역 평화 증진에 힘쓰고 서구 세력의 침입을 막아내는 아시아 경제·안보 통합체를 일찍이 주창한 사람이었고, 이제서야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구상들의 밑그림을 그렸다.

안중근이 그 무엇보다도 애국지사·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아시아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사상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발생한 의거에 너무도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다. 일본 분교대학의 와카바야시 이뻬이(Ippei Wakabayashi) 교수도 지적하듯이 “안중근이 아마도 아시아에서 최초로 세계 시민의 개념을 구체화한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조국의 독립을 향한 그의 염원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과 맥을 같이 했다. 그는 서구 식민주의를 ‘백화(白禍)’라 칭하면서 이것이 아시아 전 국가를 위협하고 있으며 각국이 힘을 합치면 이러한 제국주의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러한 협력에 걸림돌이라고 여긴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그가 한일 두 나라의 친선을 저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중근에 대한 오해 중 한 가지는 그가 배일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이 같은 오해가 사라질 것이다. 사실 안중근은 19세기 말 일본이 이룬 급속한 경제 발전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교도관들과도 유대 관계를 가져 그들에게 붓글씨를 써주었고 일본인 가족들은 이것을 대대손손 물려주고 있다. 안중근은 메이지 천황이 한국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확고하게 지지한다고 믿어 그를 존경하기도 했으며, 그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혐의를 적은 목록을 천황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했던 점을 볼 때 그는 천황이 서구 세력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아시아 국가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자신과 뜻이 통하는 인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범아시아주의’로 알려져 있는 이러한 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 초 일본의 침략주의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로 작용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범아시아주의에 대한 구상과 당시 일본의 주요 정책 입안가들의 견해가 현저히 달랐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안중근의 범아시아주의 구상은 어떠했는가? 비록 자신의 이론을 완벽하게 펼치지는 못했지만, 안중근은 저서에서 두 가지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첫째, 한국·일본·러시아·중국이 다국적 평화유지군을 결성해 러시아와 일본이 점령해온 중국 북동부의 뤼순에 파병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분쟁이 끊이지 않은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함께 유지함으로써 4개국이 오랜 불신과 대립구도를 버리고 상호 신뢰를 구축하며 공동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한·중·일 간의 긴밀한 경제적·문화적 유대 관계 때문에 안중근은 3국 공동 화폐 발행을 주장했다. 그는 일본의 대륙 침략이 부분적으로 경제적인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고, 공동 화폐 발행을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았다. 또한 이 같은 ‘아시아 은행’이 자국의 신흥 산업에 자금을 대는 방안을 모색 중이던 한국과 중국에 필요한 자본을 제공하고, 미래에는 이것이 더욱 확대되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안타깝게도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제국주의 일본이 유럽 나치 독일의 유사한 정책과 더불어 결국 전 세계를 참혹한 전쟁 속으로 몰아 넣은 팽창주의 행보를 고수한 가운데 안중근의 주장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아시아가 예전에 안중근이 구상했던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국가간 경제 의존성이 증가하는 분위기 속에서 최근 아시아개발은행이 세계 금융위기 동안 아시아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139조원의 기금을 조성했고, 그 중 80퍼센트가 한·중·일로부터 마련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은 이미 미국을 제치고 한국과 일본의 최대 무역 상대국의 위치에 올랐다. 이는 한·중·일 3국의 경제적 유대 관계가 강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지역 협력이라는 테마를 이어나가면서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 신임 총리는 최근 뉴욕타임즈 사설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지역 화폐 통합을 이루기 위해 힘쓰고 이러한 노력을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항구적 안보 틀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성명서는 안중근이 직접 쉽게 작성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시아 각국이 지역 통합 강화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행보를 이어 나가고 있는 와중에 역사학자들은 안중근을 돌이켜보며 이러한 비전을 전파했던 효시로 여기게 될지 모른다. 그를 기소했던 사람조차 “의사”라 칭했던 인물의 사상이 2009년에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다.

* 저자는 2006년부터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내년 봄학기부터 연세대학교에서 국제무역금융 석사 과정을 이수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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