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페이지 내용 : 4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몽골인들의 인식이 이처럼 어그러졌을까? 이것 이 큰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약소국의 자기방어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2. 반중 정서의 역사적 배경 일반적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이 그렇듯이 역사 속의 몽골과 중국의 관계도 그다지 원만하 지 못했다. 양측의 껄끄러운 관계는 고대 농경민과 유목민의 관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도발은 농경민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상징이 만리장성이다. 우리 통념 속의 장성은 북방 민족 또는 유목민의 침 략을 막기 위한 농경민의 방어막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장성은 남쪽 농경민들이 초원에서 유 목민들을 몰아내고 북방을 통제하고자 쌓은 장벽, 즉 침략의 상징물이라는 것이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 는 향후 연구로 더 명확히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장성 남북의 생태환경을 보면 후자 쪽 의견이 맞을 가 능성이 훨씬 높다. 만리장성 남북에는 원래 풀이 무성한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는 이곳이 유목민의 삶 의 터전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그 초원으로 들어가 농경지를 일구고, 거기에 말뚝을 박고, 인위적 으로 성을 축조한 사람들이 농경민이니 침략자는 바로 농경민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이처럼 농경민이 만든 장성을 사이에 두고 유목민과 농경민은 수천 년 동안 공방을 거듭했다. 그 과정 에서 두 집단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편견을 갖게 되었다. 예컨대 농경민은 유목민을 중원과 주변국을 침 략하는 흉포한 집단이자 떠돌이 생활을 하는 야만인 또는 문명의 파괴자로 기록했다. 그리고 이는 『사기 史記 』와 『한서 漢書 』 이래 “인면수심 人面獸心 ”으로 대표되는, 지난 2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농경민이 갖 고 있던 유목민 상 像 의 핵심이 되었다. 반면에 만리장성 북방의 유목민들은 중원의 한인 漢人 왕조와 대 립하면서 세계의 중심에 군림한다는 중국 황제의 중화주의적 주장이나 중국인의 화이관 華夷觀 에 입각 한 뿌리 깊은 문화적 우월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한나라와 흉노 匈奴 의 대립에서 본격화된 두 집단의 대립은 그 후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서로 지 배와 피지배 관계를 나눠 가졌다. 원나라 시대 12711368 한인들은 몽골인의 직접적 지배를 받았고, 청나 라 시대 16361911 몽골인들은 만청 滿淸 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는 원나라 시대가 남북 분열을 극복하고 중화 민족을 통합한 위대한 중화왕조로 기술되어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 나라 지배기는 야만인들이 중화 문명을 짓밟은 치욕의 시대로 평가되었다. 청나라 시대에는 한인들이 몽골인을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대 몽골인이 중국과 중국인을 대하는 인식의 뿌리가 주로 이 시기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 지배기는 현대 몽중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중요하다.
5페이지 내용 : 5 청 지배기 초기에 청 조정에서는 한인들이 만주족의 발상지인 만주와 몽골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른바 봉금정책 封禁政策 이다. 그러나 청 지배기 후기로 갈수록 인위적인 통제 정책은 실효성을 잃었고 한인들은 장성을 넘어 몽골 초원으로 이주했다. 한인들의 이주는 몽골 사회에 여러 문 제를 가져왔다. 이주 한인들은 물론 농경민들이었고, 이들은 목초지를 개간하였다. 목초지 개간은 유목 민들 생계 터전의 파괴를 의미했고, 이는 농경민과 유목민의 사활을 건 투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현지 지배층과 결탁한 ‘여몽상 旅蒙商 ’이라 불린 한인 상인들과 고리대업자들의 수탈로 인하여 유목민의 생활 이 피폐해지면서 양자의 대립은 화해 불능 상태로 치달았다. 그 결과 몽골 각지에서 반청 및 반봉건 투 쟁이 발생했는데, 전자는 만청의 관리 그리고 한인 농민과 상인을 겨냥한 것이고, 후자는 그들과 결탁한 몽골 지배층을 겨냥한 것이었다. 당시 자료에는 한인 농민들의 몽골 진출로 인해 목초지를 잃고 방랑한 유목민들과 한인 상인들의 협 잡으로 빚더미에 앉은 유목민들의 비참한 상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유목민의 생활 터전을 강탈하는 나쁜 한인 한인 농민 , 유목민을 속이는 사악한 한인 한인 상인 , 이들을 지원하고 몽골인을 탄압하는 포악한 만청의 관리’라는 인식의 기본 틀이 갖춰졌고, 이러한 인식의 틀이 20세기로 이어졌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몽골인들은 그해 12월 1일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듬 해에 성립된 중화민국이 청나라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몽골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여 몽중 관계가 복 잡해졌다. 이때부터 제정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이른바 ‘몽고문제 蒙古問題 ’를 놓고 밀고 당기는 외교 교 섭이 시작되었다. 그 후 역대 중화민국 정부는 몽골 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다가 장제스의 국민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몽골의 독립을 수용하였고 1946년 1월 5일 , 중화인민 공화국 성립 후에는 소련의 권유로 몽골과 외교 관 계를 수립했다 1949년 10월 16일 그러나 신해혁명 직 후 성립된 민국 정부는 물론이고 장제스의 국민 정 부, 심지어 마오쩌둥의 신중국 정부까지도 몽골의 독립 승인과는 별개로 몽골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 키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1956년 중국에서 출간 된 지도에 몽골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 경선 표시가 미정 未定 을 뜻하는 ‘가는 점선’으로 되어 있는 반면, 몽골인민공화국과 소련의 국경선 은 이정 已定 을 뜻하는 ‘굵은 점선’으로 되어 있는 1911년 몽골 혁명 당시의 반중몽골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