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페이지 내용 : 4 동북아역사리포트 드 영토는 수백 킬로미터 서쪽으로 이전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영토 변경으로 약 800만에 이르는 독일 인이 강제 이주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수반되었다. 전후 서독인은 전쟁 중 자신들이 자행한 범죄 행위보다 동부 독일 지역에서 추방당했을 당시 독일인 이 겪은 고통에 시선을 집중했고, 소련, 폴란드, 체코 등 추방자 국가와 포츠담 결정에 책임이 있는 연합 군의 희생자로 자신들을 부각시켰다. 1949년 9월 20일 정부 선언에서 아데나워 정부는 나치당원에 대 한 사면과 전후 서독 사회로의 통합, 피추방자의 통합 및 1937년 독일 국경에 대한 권리 요구 견지를 역 사 정책의 중심 방향으로 제시했다. 전후 서로 다른 진영으로의 편입과 체제 대립은 역사 해석에서의 차 이를 더욱 확대했다. 역사적 화해를 위한 진지한 시도는 1960년대에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에서 시작됐다. 개신교 평신도 8명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범죄를 고백하고, 오데르-나이세 국경을 인정할 것을 분명히 요구했 다. 이들의 ‘튀빙겐 각서’ 1962. 2. 는 폴란드와의 화해를 요구하는 담론 형성에 중요한 자극을 제공했다. 1965년 10월에는 독일 개신교 평의회가 같은 취지의 각서를 발표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한 달 뒤 ‘폴 란드 주교들이 독일 기독교 형제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는 1천 년 동안의 독일-폴란드 관계사에서 긍정 적인 측면들을 부각하고, 나치 시대 독일인 희생자와 전후 독일인 난민, 폴란드로부터 고향을 잃고 추방 된 독일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우리는 용서하며 또한 용서를 구한다’라는 이 서한의 정신은 이 후 독일-폴란드 교과서 대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1969년에 폴란드 공산당 서기장 고무우카 Władysław Gomułka 가 서독 정부에 협상을 요청했고, 서독 정 3등 분할? 결코 안 돼! 전후 동서독 분단과 독일 동부 지 역 상실을 반대하는 서독의 포스터. 오른쪽 흰 선이 현 재 독일-폴란드 국경인데, 그 북쪽에서는 오데르강, 남 쪽에서는 지류인 나이세강이 국경을 형성하고 있다. 전후 오데르-나이세 국경 획정이 독일-폴란드 관계를 개선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것을 풍자하는만평
5페이지 내용 : 5 동북아역사리포트 부는 빌리 브란트가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모토하에 신동방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1970년 12월 7일 바 르샤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맺어진 이 조약은 오데르-나이세 국경의 불가침성을 확 고히 해 독일의 수정주의, 곧 독일-폴란드 국경을 바꾸고자 하는 의도에 대한 두려움을 상당히 경감시켰다. 1970년대부터 형성된 폴란드의 반체제 세력들은 양국 간 역사 갈등 문제에 전향적인 인식을 지녔다. 폴란 드 반체제 인사들은 서독인이 나치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보상을 수행했고 서유럽적 가치를 수용했으므로 그들을 용서해야 하며, 강제 이주와 관련하여 독일 주민이 겪은 고통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독일-폴란드 교과서 협력과 공동 권고안 1948년부터 독일-프랑스 교과서 대화를 성공적으로 추진했던 독일 유네스코 위원장인 게오르크 에 커트 교수 Georg Eckert 는 폴란드 측 파트너인 블라디슬라우 마르케비치와 함께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1972년 2월 바르샤바에서 제1차 독일-폴란드 교과서협의회를 진행했다. 역사 가, 지리학자, 교육학자, 교과서 전문가, 교과서 출판업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회의는 개방적이고 학문 적으로 진지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양측 모두 실용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없었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유대인 봉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탑 앞에 무릎 꿇은 서독 빌리 브란트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