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훙장, 1880년대 초반부터 청일전쟁(1894-1895)까지 청나라의 조선 정책을 총괄한 책임자
리훙장과 조선
리훙장은 문인 관료면서 회군(淮軍)이라는 의용군을 조직하여 상군(湘軍)을 조직한 자신의 스승 쩡궈판(曾國藩)과 함께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후 남양대신(南洋大臣), 북양대신(北洋大臣)을 거치며 양무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또한 외교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하여 중요한 외교 교섭들을 주도했다. 대외적으로는 일관되게 열강과 평화를 유지하며 시간을 벌고, 대내적으로는 자강운동을 통한 국력 강화를 주장했다. 외세에 대한 타협적 태도로 인해 국내의 대외 강경론자들에게 매국노라 지탄받기도 했으나, 외국인들은 그의 노련한 정치적·외교적 수완을 두고 ‘동방의 비스마르크’라 불렀다. 청 정부도 이례적으로 1871~1894년까지 25년 동안이나 그에게 직예총독(直隸總督) 겸 북양대신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그가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1880년대부터 조선 정책을 실질적으로 주관하게 된 것 역시 북양대신으로서의 직책 때문이었다.

조선에 파견되어 간섭 정책을 수행한 위안스카이
조선 문제에 대한 관여
조선은 병자호란의 패배(1637) 이후 250여 년 동안 청과 조공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청나라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열강과 분쟁을 겪고 있는 조선에 대해 “조선은 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지만 자주적 권리를 행사하는 국가”라고 주장하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조일수호조규』(1876) 역시 조선을 자주지방(自主之邦), 즉 독립된 주권국가로 천명하였다.
1879년 일본이 청의 조공국이었던 류큐를 합병하고, 청과 러시아가 이리(伊犁) 문제를 두고 전쟁 위기를 겪게 되면서 리훙장은 조선에 대한 청의 불간섭 정책에 변화를 줄 필요성을 느꼈다. 조선은 청나라의 동북방을 지키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조선이 타국의 수중에 넘어가면 청의 안보를 크게 위협할 수 있으나, 청의 국력으로는 조선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조선 스스로 서양 제국과 국교를 맺고 통상함으로써 여러 열강이 조선에서 서로 견제하여 세력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주일공사 허루장(何如章)은 리훙장의 의견에 더해 서양 열강이 조선을 청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으로 간주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청이 서양의 종속국(dependent state)처럼 조선의 외교를 관장해야 하며, 조선의 ‘속국’ 지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훙장은 조선과 열강이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조선 문제에 대한 관여는 여러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조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을 주관하면서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아니라는 인상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였다.

청일전쟁의 평양성전투를 묘사한 일본 민화, 우키요에(浮世絵)
종주권 강화와 청일전쟁
조선의 문호개방을 통해 청의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속국’ 조선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리훙장의 계획은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 등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성공하는 듯했으나, 임오군란의 발발로 인하여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청 정부는 군대 3,000명을 파견하여 내란을 진압하고 그것이 ‘속방’을 보호하기 위한 종주권의 행사임을 천명하였다. 종주권의 강화는 갑신정변과 조러밀약 사건, 고종의 자주외교 등 청에 대한 저항을 야기했다.

청일전쟁 당시 압록강 하구에서 전투를 치루는 북양함대
조선 문제가 복잡한 상황에 처하자, 청 조야에서는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키거나 감국대신(섭정)을 파견하여 조선 정치를 주관하자는 주장이 쏟아졌다. 그러나 리훙장은 이에 반대하며 외교적 수단을 통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안정을 추구했다. 톈진조약으로 조선에서 청일 양국의 군대를 완전히 철수하였으며, 러시아와 구두 합의를 하여 조선의 현상유지와 영토보전을 약속받고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 군대를 철수시켰다. 군사력의 공백은 북양함대의 정기적인 한반도 순시,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파견을 통한 감시와 협박, 전신 부설, 해관 장악, 차관 대출등으로 만회하였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종주권 주장을 강조할수록 청의 조선정책은 탄력을 잃었다.
리훙장의 결정적 실착은 종주국으로서 ‘속국’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동학농민운동에 군대를 파견한 것이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그동안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조해 온 청으로서는 ‘조선은 속국이지만 자주’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