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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새 책
‘패사(覇史)의 세계’를 열다
  • 이성제 한중연구소 연구위원
-『십육국춘추집보』 역주작업과 출간-

패사의 탄생
 
중국 역사에서 유연이 전조(前趙)를 세운 때부터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 시기까지를 ‘5호16국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는 화북 각지에서 흉노‧선비‧갈‧저‧강의 세력이 나라를 세우고 난립했던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 인식은 북위의 최홍(崔鴻)이 편찬한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처음 제시되었다.
 
4세기 초부터 화북 각지에서 할거했던 국가들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저마다 역사서를 저술하였는데, 이들 5호16국이 저마다 펴냈던 사서를 일러 패사(覇史)라고 하였다. 그리고 십육국춘추』는 이들 패사를 기초로 편찬된 사서였다. 최홍 열전에 따르면 95권의 저술을 마친 것은 506년이었고, 522년 강남에서 성한(成漢)의 역사서를 구해 마침내 책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각국사를 모으기 위해 적지에서까지 사료를 수집한 것이다. 이로써 서진의 붕괴로부터 북위의 출현까지 중원에서 명멸했던 16국의 역사를 일괄한 사서가 만들어졌다.

십육국춘추』의 자료적 가치
 
그러므로 십육국춘추』는 중국의 역대 정사인 24사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할 사서였다. 하지만 그간의 연구에서는 이 사서를 이용할 수 없었다. 북송 시기에 이미 완본을 얻기 어려워졌고, 그 뒤로는 잔권과 일문의 형태로 남았던 탓이다. 그 대신 십육국춘추』를 전거로 삼은 진서(晉書)』와 자치통감』의 관련 기사들이 이 시대의 ‘정사’ 노릇을 해왔다. 이에 관련 사서에 기술된 사실을 살피면서도, 그 연원이 되는 십육국춘추』의 해당 사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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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출간된 『십육국춘추집보』 표점본
『十六國春秋輯補』(中華書局, 2020)
 

십육국춘추가 사라진 뒤 그 잔권을 모으고 보충한 세 권의 집일서가 만들어졌다. 명대의 하당(何鎲)이 집일한 십육국춘추 하본(何本), 도교손(屠喬孫), 항림지(項琳之) 등이 만든 십육국춘추 도본(屠本), 그리고 청대의 탕구(湯球)가 편찬한 십육국춘추집보가 그것이다. 명청 시기에 이들 집일서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얼마 전까지 그리 우호적이지 못하였다. 위작이라고 하거나 수록 기사들이 십육국춘추의 원문 그대로라고 보기 어렵다는 등, 집일서가 가진 사료로서의 가치에는 의문이 줄곧 있어 왔다. 
 
그러던 상황에서 최근 중‧일 학계에서는 십육국춘추의 복원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시도가 하나의 추세처럼 전개되고 있다. 이제십육국춘추 집일서의 이해에도 새로운 전기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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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 학계에서 펴낸 십육국춘추 관련 서적
 『《資治通鑑》十六國資料釋證』(陳勇,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10), 『五胡十六国覇史輯佚』(五胡の会 編, 燎原, 2012)
 
 
『십육국춘추집보연구회의 공동연구
 
이러한 자료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아홉 명 연구자들이 모여 2021년에 『십육국춘추집보연구회를 결성하고 공동연구를 기획하였다. 다행히 이 연구는 이듬해 재단의 기획연구 과제에 선정되어 공동작업을 현재까지 진행해 올 수 있었다. 연구진은 100권의 집보를 각국사로 구분하여 분담하였다. 홍승현(창원대)이 전조록, 이대진(성균관대)이 후조록, 이준형(고려대)이 전연록, 정재균(성균관대)이 전진록, 이성제(동북아역사재단)가 후연록‧남연록을 맡았으며, 양진성(충북대)이 후진록‧북연록, 김한신(단국대)이 하록‧전량록, 정면(서강대)이 촉록‧후량록‧서량록, 권민균(공주대)이 서진록‧남량록‧북량록을 담당하였다.
 
연구의 목표는 우선 『십육국춘추집보 수록 기사들의 연원과 편찬 방식을 파악하는 데 두었다. 원문의 역주와 함께 다른 집일서와 대교하여 『십육국춘추집보 기사의 독자성을 살피려 하였다. 아울러 각국사의 일문(佚文)을 빠짐없이 살펴 집일서의 구성 방식을 이해하려 하였다. 또한 『십육국춘추 이후 편찬된 사서들의 기록을 대조하여 『십육국춘추집보 기사의 원형을 가늠해 보고자 하였다.
 

중.일 학계를 뛰어넘는 결실
 
이 과정에서 집보는 단순한 관련 사료의 모음집이라고 볼 수 없으며, 원형의 상당 부분을 담고 있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자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십육국춘추와 『진서‧『자치통감의 계승관계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해졌다. 『진서의 경우, 여기에 수록된 16국 관계 기사는 『십육국춘추와 유사성이 높다. 1차 사료인 나라별 사서를 참조하지 않고 최홍이 편집한 『십육국춘추에 기본적으로 의존했던 탓인 듯하다. 또한 『자치통감 16국 관계 기사는 『십육국춘추를 중심으로 가능한 많은 사료를 참조하고 문장을 다듬어 하나의 기사로 재구성하고 있는 특징이 보인다. 이 때문에 그 기재 내용이 『진서에 비해 압도적으로 풍부하다.
 
『십육국춘추의 집일서 가운데, 특히 『십육국춘추 도본이 가진 자료적 가치가 주목된다. 그동안 『십육국춘추는 북송 초기에 이르면 이미 사라졌다고 여겨져 왔으나, 민간에서 명 말-청 초까지 잔본 상태로 유전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십육국춘추 도본의 찬자들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십육국춘추 잔본을 보았고, 원서의 충실한 복원을 목적으로 16국사 관련 자료를 상세히 집성하고 편집, 역사적 흐름의 이해를 돕고 사건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십육국춘추 도본에는 『십육국춘추집보에 없는 기사가 곳곳에 보이며, 관련 기사의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들 기사는 『자치통감 기사와 중복되기도 하는데, 『자치통감을 많이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자치통감은 물론이고 『태평어람 등에서도 보이질 않는 내용도 보인다. 아마 『위서(魏書) 등 가용한 사서의 기사를 근간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자료 연구를 통해 『십육국춘추를 비롯한 16국 관계 사료의 전체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연구자 각자가 담당한 각국사에 대해서도 보다 충실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연구의 목표가 거창하다 보니 살펴야 할 자료가 상당하였고, 한두 해 공동연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십육국춘추집보 원문의 역주만 하더라도 다른 집일서와 관련 자료를 함께 살펴 가며 해석하거나 대교의 다른 내용을 반영해야 하는 등, 여간 손이 가는 작업이 아니었다. 작업의 특성상 역주 원고를 작성한 뒤에는 함께 검토하고 윤문하는 과정도 필수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윤독회는 연구회를 결성한 첫해를 제외하곤 매달 두 차례 개최되었고, 방학 중에는 2주에 한 번꼴로 열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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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사의 세계: 전조록』, 『패사의 세계: 서진록․남량록․북량록』(동북아역사재단, 2025)

이러한 작업을 통해 거둔 결과물을 ‘패사의 세계’라는 제목을 달아 펴냈다. 『전조록, 『서진록‧남량록‧북량록이 작년 말에 나왔으며, 세 권의 출판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올 하반기에는『전연록, 후연록‧남연록, 『후진록‧북연록이 발간될 예정이다. 중국과 일본 학계가 『십육국춘추』 연구에서 거둔 그 어떤 성과도 『패사의 세계에는 견줄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이 총서 발간이 5호16국 시대사와 관련 사서에 대한 연구를 새로운 단계로 이끄는 열쇠가 되기를 기대한다. 애쓴 만큼 많은 이들에게 쓰이기를 바란다.
 
『패사의 세계가 나오기까지 연구회 구성원 모두는 함께 공부하며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연구진을 대표하여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사료의 바다를 건너는 긴 항해의 여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