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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STORY
역사의 양면과 마주한 히로시마에서 평화를 묻다
  • 박아름 세계일보 기자
지도에서 지워진 ‘비밀섬’ 속 독가스 공장과 앙상한 철골만 남은 원폭돔. 역사의 양면을 품고 있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국 청소년들은 군국주의라는 일본의 ‘가해’ 역사와 원자폭탄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된 ‘피해’의 기억을 차례로 마주했다. 비극의 역사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선 대전만년고등학교(이하 만년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독가스 공장 '오쿠노시마’
 
동북아역사재단의 ‘2026 동북아 역사교류 활성화지원사업’을 통해 만년고 역사교류 동아리 ‘휴먼링크’ 학생 15명이 7월 19일부터 22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 히로시마를 찾았다. 
 
19일 첫 일정으로 찾은 곳은 히로시마현 다케하라시 앞바다의 작은 섬 오쿠노시마였다. 수만 마리의 토끼가 뛰어놀아 ‘토끼섬’으로 유명한 이 섬은, 오늘날 연간 수십만 명이 찾는 관광지이지만, 한때는 지도에서조차 지워졌던 일본군의 비밀 독가스 생산기지였다. 
 
1927년 일본 육군은 오쿠노시마를 독가스 공장 부지로 결정했고, 192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까지 겨자가스(이페리트), 루이사이트 등 각종 화학무기를 대량 생산했다. 일본은 1925년 화학무기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의정서의 서명국이었지만 개발과 생산을 지속했다. 심지어 공장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섬을 지도에서 삭제했다. 노동자들에게도 철저한 비밀 유지가 강요됐다. 
 
학생들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발전소 터였다. 지금은 콘크리트 골조만 남은 폐허지만, 당시에는 디젤 발전기를 가동해 공장에 전력을 공급하던 시설이다. 전쟁 말기에는 여학생들이 이곳에서 벌어진 ‘후고(풍선폭탄)’ 실험에도 동원됐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만드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위험한 작업에 투입됐고, 독성 물질에 노출돼 평생 후유증에 시달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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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오쿠노시마 독가스 생산기지를 둘러보는 만년고 학생들
 

종전 후 일본 정부가 자료의 대부분을 폐기하면서 진상은 오랫동안 묻혔다. 1954년에서야 피해자 구제가 시작됐지만, 충분한 보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피해 노동자들과 학도생들은 자료 보존과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을 꾸준히 벌였고, 그 결과 오쿠노시마에는 독가스 자료관과 위령비가 세워져 오늘날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공간으로 남게 됐다.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이 위험한 작업에 동원되었다는 설명을 듣자, 학생들의 표정은 이내 무거워졌다.
 
사진으로 봤을 땐 토끼가 뛰어놀고 예쁜 곳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이곳에서 그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만년고 이나희 학생
저와 같은 또래의 학생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게 너무 안타깝고, 또 직접 그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만년고 양유진 학생
 

3만여 명의 넋을 기리는 조선인 위령비 앞에서

둘째 날인 20일에는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된 현장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았다. 당시 미국은 대규모 군사시설이 밀집해 있으면서도 공습 피해가 적었던 히로시마를 ‘원폭 효과를 검증하기 적합한 도시’로 판단했다. 폭발 한 번으로 도시 건물의 약 70%가 무너졌고, 8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학생들의 발걸음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강제동원 등으로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조선인 중 원폭으로 희생된 3만여 명의 넋을 기리는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앞이었다. 고종의 손자인 이우 공도 이곳에서 피폭되어 숨졌다. 위령비는 일본 사회의 반대로 한동안 평화공원 밖 강변에 세워져 있었지만,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1999년 지금처럼 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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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앞에서 묵념을 하는 만년고 학생들
 

학생 대표 이유리 학생은 준비해 온 편지를 읽으며 희생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너와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고향이 아닌 이곳에서 아픔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 아파. 나는 지금 평화로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평화는 너와 같은 수많은 희생 위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해. 오늘 이 자리에는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이 함께 서 있어. 우리는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만났어. 서로를 이해하고, 아픔을 기억하며, 평화를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을 너에게 전하고 싶어. 
-만년고 이유리 학생
 
편지를 통역하던 현지 코디네이터는 목이 메었고, 한일 학생들과 교사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귀를 기울였다.
 
전날 일본의 ‘가해’를 마주한 데 이어 원폭 피해 참상을 목도한 학생들은 고민에 빠졌다. “원폭 사건이 없었다면 일본이 또 다른 제노사이드의 가해자가 되었을까?”, “무고한 시민들과 조선인들이 희생되어 마음이 혼란스럽다”라는 등 질문을 나누며 피해와 가해의 역사를 성찰하기 시작했다.
 
대전만년고 윤현미 교사는 “평화기념관에는 피해만 기록돼 있고, 가해의 주체와 원인이 일본의 군국주의라는 사실은 빠져 있어 학생들이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거 같다”며 “그럼에도 학생들이 피해와 가해의 역사를 모두 정직하게 직시하려는 모습이 매우 뿌듯했다”라고 전했다.
 

평화라는 미래를 약속하다
 
셋째 날인 21일, 만년고 학생들은 고민을 안고 후쿠야마 에이신고등학교를 방문했다. 일본 학생들은 “안녕하세요. 에이신고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서툰 한국어 인사와 박수로 만년고 학생들을 맞이했다. 어색함도 잠시, ‘아이엠그라운드’ 게임을 함께하며 금세 마음의 장벽을 허물었다. 
 
BTS를 좋아해 한국어를 독학했다는 에이신고 사키 학생은 “한국을 너무 좋아하고 자주 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라며, “하지만 아직 일본 사회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라고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
 
이어 만년고와 에이신고 학생들은 ‘평화 실천’을 주제로 머리를 맞댔다. 평화를 논하기에 앞서 일제강점기 등 한일 양국의 역사적 이해관계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등은 예민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수적인 논의 거리였다. 두 학교 학생들은 서로를 배려하며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사실 역사 문제 때문에 일본을 미워했지만, 너희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만년고 임호윤 학생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올바로 배워서 우리가 미래의 평화를 만들어 가자.
— 에이신고 마사야·유키 학생
 
만년고 최재이 학생은 “일본과의 교류를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적 문제로 인해 양국 간 누적된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짚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두 학교 학생들은 후쿠야마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함께 둘러봤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을 잊지 않겠다는 취지로 관련 자료와 유품 등을 전시한 공간이지만, 일각에선 일본의 군국주의 가해 역사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다는 이유로 ‘반쪽짜리 평화’라고 비판하는 곳이다. 
 
학생들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에는 깊이 공감하면서도 일본 역사관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양유진 학생은 “홀로코스트 기념관처럼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관이 일본 내에 있을지 궁금해진 하루였다”고 말했다. 에이신고 사카이 학생은 “과거를 바꿀 순 없다”며 “올바로 배워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만년고 문인식 교사는 “학생들이 역사의 모순을 마주해 스스로 고찰하는 것도 큰 배움의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교류 사업을 통해 우리 학생들이 역사를 다층적으로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길 바란다”고 전했다. 
 
“우리는 이 비극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가.” 가해와 피해가 교차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학생들은 끊임없이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불편하고 아픈 역사를 마주하는 용기, 그리고 서로에게 손을 내민 진심이었다. “우리의 만남이 평화의 첫걸음이길 바란다”는 일본 학생의 화답에서, 묵은 혐오를 넘어 한일 청소년들이 함께 만들어갈 미래의 평화와 그 가능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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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등을 공부하는 ‘다문화클럽’ 동아리실을 만년고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에이신고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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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만년고와 에이신고 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