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1년, 한일 역사 인식의 변화와 새로운 과제-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였다. 이는 현재를 사는 우리가 과거를 주체적으로 성찰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전망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06년에 설립된 동북아역사재단이 창립 20주년을 맞이한 지금, 재단의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지를 자문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역사에 대한 정의였다. 급변하는 정세와 다양한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우리의 ‘현재’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이를 지혜롭게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와 한일 관계
2026년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급변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 이후 미중 대립과 협력, 북한 핵 문제, 타이완 문제와 안보 지형의 변화, 북·중·러와 한·미·일 대치, 자국중심주의와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확산 등으로 최근의 국제 정세는 예측을 불허한다.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81년을 맞이한 오늘날, ‘광복’, ‘종전’, ‘패전’, ‘전승’ 등 각국이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역사를 둘러싸고 역사수정주의와 역사부정론 등이 확산되고 있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재집권한 자민당의 아베 정권은 일본 사회의 보수화를 배경으로 2020년까지 이어지며 최장기 정권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둘러싼 갈등은 한일 간 역사 문제를 경제와 안보 분야로까지 확산시켰고, 한일 관계는 광복 이후 ‘최악’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현 다카이치 정권에서는 자민-공명 연정이 26년 만에 결렬되고 자민당 강경 보수세력과 유신회가 손을 잡으면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유신회와 같은 보수우익세력에 의존함으로써 집권 여당의 보수 우경화가 가속화되고 있어, 역사 인식 문제가 재발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제 과거 전쟁에 대한 성격과 책임에 대한 일본 내 여론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 여론조사에서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침략전쟁’으로 보는 응답이 50%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2025년 여론조사에서는 ‘침략전쟁이었다’는 응답이 28%, ‘자위전쟁이었다’는 응답이 8%인 반면, ‘침략전쟁과 자위전쟁 양쪽 측면이 모두 있다’는 응답이 42%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전후 81년, 세대교체와 기억의 변화
전후 일본 사회에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230만여 명이 희생된 참혹한 전쟁의 결과와 패전의 기억 속에서 평화의식이 폭넓게 형성되었다. 이러한 일본인의 평화의식의 중심에는 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한 현실에 직면하여 생겨난 피해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전쟁과 군대에 대한 거부감 형성으로 이어졌고, 다시는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평화헌법이라는 사회적 합의와 결의로 발전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평화에 대한 합의가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의식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국체(國體)의 유지를 우선시한 제국주의 일본의 ‘전후 처리’와 냉전체제라는 환경 변화에 기인한다. 그 결과 전쟁의 가해자로서지녀야 할 책임의식은 우선순위에서 밀려 퇴보하였고, 전쟁은 물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의식 또한 매우 희박해졌다. 결국 과거의 식민 지배와 침략전쟁의 성격 규명과 책임 문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모호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복‧종전 81년이 지나고 당시를 직접 체험한 세대가 감소하면서 역사 인식도 변화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일본 총무성 통계에 따르면 전전(戰前) 출생 인구는 약 10% 정도에 불과하고, 전후 출생자가 약 90% 이상을 차지한다. 옛 일본군 출신 인구는 1만 명 이하로 감소하였고(1970년에는 125만여 명), 2024년 전체 국회의원 가운데 전후 98%가 전후 출생 의원으로 채워졌다.
일본 사회의 세대교체와 전쟁 체험 세대의 감소로 과거 역사에 대한 기억의 단절이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일본 사회의 개헌 및 ‘보통국가’에 대한 요구도 강화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안보정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베 장기 집권기에는 집단적 자위권 용인, 전수방위 정책의 전환, 방위예산의 대폭적인 증가 등 안보정책의 전환이 추진되었으며, 헌법 개정을 위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의 방위비는 지속적으로 늘어나 현재 9조 엔에 이르렀으나 이러한 정책 전환에 대한 반발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한다. 이는 전후의 평화헌법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평화주의를 지지하고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던 세대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총리 담화에 나타난 역사 인식
일본에서는 8월 15일을 종전기념일로 정하고 무도관에서 ‘전국 전몰자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는 일본 ‘천황’의 메시지인 ‘오고토바(おことば)’와 총리의 ‘식사(式辭)’가 발표된다. 이때 사용되는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이 포함된 메시지는 국제사회를 향한 발신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전쟁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포함한 담화를 발표한 이후, 추도식에서는 일본의 가해에 대한 언급과 사과가 계속 이어졌으며, 특히 아시아 주변국과 지역의 희생자를 애도하였다. 그러나 2013년 아베 정권 이후 총리의 추도사에 포함되었던 ‘반성’이라는 표현과 가해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었다. 아베 총리는 2015년 전후 70주년을 맞이하여 ‘아베 담화’를 발표하면서 담화문에 “사죄를 다음 세대까지 계속 반복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후 스가 요시히데와 기시다 후미오 총리 시절에도 추도사에서 가해와 반성에 대한 언급은 사라졌다.
이시바 전 총리는 2025년 8월 15일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서 ‘반성’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하였다. 이에 전후 80주년을 맞아 각의 결정을 거친 정부의 공식 입장인 ‘이시바 담화’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보수세력의 압력 때문이었는지, 결국 10월 퇴임을 앞둔 시점에 기자회견을 통해 총리 개인의 ‘소감’을 발표하는 데 그쳤으며, 이 소감에서는 ‘식민 지배’와 ‘침략’이 언급되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일본 사회가 근대 일본 제국주의로 인한 전쟁과 식민지 통치의 성격 및 그 책임에 대해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뉴미디어 시대, 역사수정주의의 확산
인터넷의 보급과 미디어의 다양화에 따라 정보 전달 방식도 변화하였으며, 이는 역사 인식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터넷의 보급은 역사수정주의 세력의 주장과 지식이 빠르게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발전은 대중에게 정치·사회 문제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전문가의 참여 기회가 확대되면서 전문가의 평가가 중시되던 기존의 여론 환경도 변화하였다.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소수의 전문가들과 비전문가들은 도서, TV, 유튜브 영상 등의 매체로 진출하여 역사수정주의 담론을 확산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수정주의적 주장은 사실과 진실이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사실을 왜곡하고 배외주의 등을 확대시킨다. 이는 혐오와 차별, 가짜뉴스 등 현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무대응으로 일관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미디어와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수정주의적 주장을 인정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그동안은 주로 학술적으로 자료에 기반한 비판과 오류 지적을 통해 대응해 왔으나, 이것이 효과적인 대응이었는지는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거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보가 생산‧유통되고 있는 오늘날, 역사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응 방식에서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창립 20주년, 재단의 새로운 역할과 과제
동아시아 역사 현안 연구와 정책 대응을 위해 설립된 우리 재단은 지난 20년간 축적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더욱 정확하게 규명하고, 그 성과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전달해 나갈 것이다. 아울러 변화하는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국내외 연구자 및 관련 기관과의 연대를 강화하며, 미래세대와 역사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넓혀 나가겠다. 엄밀한 연구를 토대로 역사수정주의와 역사부정론에 단호히 대응하되 대화와 협력의 가능성은 계속 열어 둘 것이다. 이를 통해 과거에 대한 성찰을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을 위한 실천으로 이어가고, 올바른 역사 인식이 더 나은 미래를 여는 든든한 토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